디지털 네트워크 시대, 다변화하는 미술의 존재 양식

김남시
김남시는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훔볼트 대학 문학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5년부터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옮긴 책으로 다니엘 파울 슈레버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프리드리히 키틀러 『축음기, 영화, 타자기』, 아비 바르부르크 『뱀 의식』 등이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와 미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대면 공연이나 전시가 온라인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배후에는 카메라, 컴퓨터, 스마트폰 등의 기술적 장치를 연결시키는 고도의 상호 협력적 연결망이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팬데믹은 예술이 이러한 기술적 연합 환경에 편입되는 속도를 가속화시켰고 이는 예술의 존재 양식에 변화를 일으킨다. 기술적 네트워크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돼 있던 공연이나 전시가 온라인화되려면 그 생산 과정에서부터 기술의 침투가 불가피하다. 예를 들어 무용 공연을 온라인화하려면 무용수와 관객 사이를 매개하는 카메라가 필수적이다. 무대에서 관객을 마주하던 무용수가 카메라를 매개해야 한다면 무용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한다. 관객이 있는 방향을 준거로 움직이는 데 익숙하던 무용수는 이제 관객의 시선과는 전혀 다르게 작동하는 좁은 카메라 렌즈를 움직임의 준거로 삼아야 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연속적 흐름으로 진행되던 공연이 촬영을 위한 컷으로 단절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몸의 리듬이 요구된다. 나아가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무용수의 몸은 카메라에 의해 재구성되는 요소로 변한다. 카메라는 무용수의 팔이나 다리를 프레임에서 제거해 버릴 수도, 무용수가 염두에 둔 관람 방향과는 전혀 다른 시점에서 무용수의 몸에 접근할 수도 있다. 촬영 및 편집의 과정은 무용수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움직임을 끊거나, 반대로 무용수가 움직임의 종결이라 여겼던 지점 이후를 영상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상을 보는 무용수는 자신의 움직임이 카메라에 의해 분절돼 조립됐다고 느낄 것이다.1 카메라가 무용의 중심에 자리 잡고 무용수와 동등하거나 심지어 더 우세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상황에서 무용수는 기술적 장치와의 협업 체제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신체의 현전을 전제로 하던 공연 예술과 비교하면 미술은 훨씬 오래전에 기술적 장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오프라인 전시 자체가 어려워지자 미술 분야에도 새로운 적응이 요구됐다. 전시장의 물리적 공간과 관람자의 신체적 현전을 요구하던 회화, 조각, 설치 등은 물론, 전시장 스크린에 투사되거나 모니터로 상영되던 영상물 역시 비대면 관객에게 전송 및 전달돼야 하기 때문이다. 카메라, 조명, 편집 장치는 물론 그렇게 제작된 생산물에 관객의 접근을 보장하는 온라인 네트워크가 필수적이 되고 이는 미술의 존재 양식에 변화를 일으킨다. 이 글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 변화에 대해 가늠해 보려 한다.

팬데믹 초기, 예정된 전시를 열 수 없게 된 미술관들은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들을 영상으로 촬영해 미술관 웹사이트나 유튜브 등 온라인 플랫폼에 게시했다. 온라인 전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생산된 작품들을 관람하는 방식을 영상으로 대리하려는 이 방법의 한계는 분명했다. 내레이션 등을 부가함으로써 작품과 전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는 하나 전시 관람을 일방적인 영상 시청이라는 수동적 행위로 축소시킨 것이다.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VR 전시다.2 VR 카메라로 전시장을 촬영한 후, 웹사이트에 VR 이미지를 제공하는 이 방식에는 장점이 있다. 컴퓨터 마우스나 VR 기기를 통해 관객은 전시 공간을 스스로 이동하며 공간 내에서 작품의 위치와 규모, 설치 방식을 체험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링크된 영상 작품의 시청도 가능하다. 하지만 VR 이미지만으로 이루어진 텅 빈 전시장을 홀로 돌아다니는 관객은 마치 절멸 이후의 미술관에 와 있는 듯한 고립감을 감내해야 한다. 이는 전시 관람이라기보다는 작품들을 전시 환경과 함께 기록한 전시 아카이브를 둘러보는 일에 가깝다. 내가 보기에 이런 두 전시 방식의 한계는 기술적 장치의 부족함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장치를 이전의 존재 양식 그대로의 작품과 전시를 대리, 시뮬레이션하는 수단으로만 채택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한편 최근의 미술은 디지털 연합 환경에 조응하는 새로운 존재 양식을 실험 중이다. 스마트 폰과 SNS가 집, 학교, 카페, 여행지 등 일상의 모든 장소를 데이터화해 네트워크로 공유하는 일을 보편화시켰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도 미술관은 저작권이나 관람 방해 등을 이유로 관객의 사진 촬영을 금지해 왔다. 하지만 2014년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 2015년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을 필두로 미술관 내 사진 촬영이 허용되면서 미술관과 그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스마트폰을 집어든 관객을 통해 글로벌 이미지 네트워크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2017년 작가 김가람은 미술 전시장을 관객들이 셀카를 찍어 SNS에 업로드하는 장소로 만든 작품 〈#SELSTAR〉로 반향을 불러냈다. 여기서 작품은 전시장에 설치된 구조물만이 아니라 이를 배경으로 촬영해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관객의 셀카 이미지들까지로 확장된다. 팬데믹 상황이 심각한 수위로 접어들던 2020년 12월 상상마당에서 열린 같은 작가의 《#Fantasy》전은 전시장과 그 곳에 설치된 작품 모두를 디지털 네트워크와 연동시켰다. 오프라인 전시장을 방문한 관객이 마치 모더니즘 페인팅인 양 작품화돼 전시된 QR코드를 스캔하면 관객의 스마트폰에서 유튜브에 업로드된 작가의 작품이 재생된다. 2021년 6월 대안공간 루프가 기획한 《노래하는 사람》전에도 같은 방법이 시도됐다. 작가 안광휘의 작품 〈Remix Greatest Hits of The Pathetic Rhymes〉(2021)이다. 여기서 유튜브에 있는 작가의 영상물을 관객의 스마트폰에 불러오는 QR코드는 오프라인 전시장 스크린에 투사돼 있었다.

이런 전시 방식의 특징은 무엇보다 오프라인 관람이 포기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방역 지침에 따른 시공간적 제약 아래 전시장을 찾은 관객은 그곳에 물리적으로 현전하는 작품과 마주하는데, 그건 기존 미술의 존재 양식(페인팅이나 스크린에 투사된 영상물)으로 물질화돼 있는 QR코드다. 이를 스캔하면 관객의 스마트폰에는 그와는 다른 형식의 작품이 재생된다. 이런 관람은 기존의 오프라인 전시 관람과도, 온라인에 게시된 전시 영상을 시청하는 것과도 다르다. 여기서 경험되는 것은 전시 공간을 찾은 관객과 자신의 디지털 기기, 이를 네트워크에 접속시키는 QR코드 링크, 네트워크에 저장된 작품 데이터 모두를 포괄하는 디지털 연합 환경 전체다. 2021년 1월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 전자음악 작곡가 및 사운드 아티스트 듀오 그레이코드, 지인의 《Data Composition》전은 전시장을 방문한 관객의 스마트폰을 작가가 구축한 웹사이트에 접속하게 해, 그를 통해 수집된 IP 주소, 관객이 전시장에 머무른 시간 데이터를 사운드 작품으로 전환해 공유했다. 오늘날의 디지털 환경에서는 구글이나 네이버를 검색하고, 인터넷에서 물건을 구매하고,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다는 등 네트워크에서 우리의 모든 활동과 시간이 데이터를 생성하고 이것이 알고리듬을 거쳐 다시 우리의 시간과 활동의 조건으로 피드백된다. 《Data Composition》에서 미술은 디지털 연합 환경 내에서 작동하는 사물과 인간 네트워크의 모델링이 된다.

위에서 소개한 작품들이 관객의 스마트폰을 매개로 오프라인 전시장과 네트워크를 연결시켰다면 디지털 네트워크 내부에만 존립하는 미술도 등장했다. 작품의 제작도, 전시도 모두 디지털 네트워크 내에서 이루어지기에 물리적인 전시 공간은 불필요해진다. 독립기획자 정소라가 운영하는 ‘네트쇼(Netshow)’는 디지털 네트워크의 중요한 매개점인 인스타그램을 전시 플랫폼으로 사용한다. 네트쇼가 기획한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김도균 작가는 2021년 4월 15일부터 24일까지 매일 일몰 전후 10분간의 하늘 모습을 촬영해 인스타그램 라이브에 올렸다. 여기서 인스타그램은 이와는 독립적으로 생산된 작품을 홍보하거나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미술 생산과 감상의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작가의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일몰의 시간은 네트쇼 인스타그램 계정에 접속한 관객의 스마트폰에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관객은 작품이 생산되는 10분의 시간을 그를 생산하는 작가와 동시에 체험한다.

디지털 네트워크를 그와는 독립적으로 생산된 작품을 지시하거나, 작품에 대한, 본질적으로 불충분할 수밖에 없는 정보 제공 수단으로 이용하는 대신 그 기술적 본성에 적합한 작품 생산 및 유통의 장으로 활용하는 사례는 이것 말고도 많아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정휘윤이 기획한 《Sujanggo 수장고》다. 2020년 9월에 시작된 이 웹 플랫폼 프로젝트는 크게 세 과정으로 이뤄졌다. 석고, 아크릴, 나무, 마대, 스티로폼 등의 물질적 재료로 제작된 참여 작가들의 실물 작품을 3D 스캔해 웹사이트에 올려놓는 것이 시작이었다. 수장고 웹사이트에서 관객은 실물로 제작된 작품의 3D 데이터를 볼 수 있는데, 관객은 작품을 자신이 원하는 시점으로 돌리거나 자유로이 크기를 조절해 가며 감상할 수 있다. 이것만이라면 작품별로 개별화된 VR 전시에 다름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획자는 일정 기간 이 작품 데이터를 누구나 다운받아 변형하도록 열어두고, 3D 편집 소프트웨어도 링크해 놓음으로써 관객을 2차 창작으로 유도했고, 그렇게 변형 및 가공된 이미지를 원래 작품의 3D 이미지와 함께 웹사이트에 게시했다. 여기서 미술은 저작권법이 정의하는 저작 인격권이나 동일성 유지권을 무효화하며 실물 작품, 그 작품의 3D 이미지, 관객이 변형한 이미지 모두를 포괄하는 하이브리드적 존재 양식을 얻는다.

이 사례들에서 등장하는 미술의 존재 양식을 ‘비물질적’이라고만 말하는 건 불충분하다. 디지털 대상은 아무런 물질적 실체성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로 인해 만들어진 디지털 네트워크 환경은 이미 우리의 일상과 삶을 실질적으로 조건 지우며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육 후이(Yuk Hui)를 따라 “디지털의 물질성”3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디지털 환경 내 우리의 모든 활동은 우리의 활동에 재귀적으로 작용한다. 이것이 가능한 건, 육 후이가 지적하듯 디지털 환경 속 나의 활동이 생성하는 “데이터가 이미 관계들이고 또한 관계의 원천”4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환경의 특징은 이러한 “간대상적 관계(interobjective Relations)”5가 우리의 활동, 사회적, 정치적 상호 작용의 조건을 구성한다는 데에 있다. 디지털 연합 환경이 갖는 이러한 “개체 초월적 집단화”6의 잠재성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자본은 “시간과 각 사회적 원자의 주목을 더 작은 조각으로 잘라 마케팅 목적을 위한 상태 업데이트, 상호 작용, 광고“7로 산포한다. 다른 한편 ”알고리즘적으로 스스로를 구성하는 자동화된 환경“8은 디지털 네트워크 내 상호 작용 참여자를 수동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육 후이는 다양한 디지털 대상들에 사용자들이 임의의 메타 데이터를 부여하는 ‘태깅(tagging)’에서 이 힘들에 맞서는 실천의 가능성을 본다. 태깅 운동은 “개별 유저를 버튼을 누르고 읽기만 하는 대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특별한 상황으로 데려가” “다른 사람과 대상에 대한 직관 및 통찰 (intuition)의 경험을 재활성화”9한다. “유저가 생성한 태그를 단 디지털 대상은 서로 다른 지향성들로 이뤄진 특별한 문화적 대상이며 상호 작용과 검색의 흔적을 재현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 특정한 문화에 속하는 대상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세계의 유아론적 명상에 대항하는 우리(we)의 구성이기도 하다.”10

디지털 네트워크 내 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기존 온라인 플랫폼을 새로운 ”우리의 구성“을 위해 전유할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가 있다. 오영진이 총괄 기획한 〈에란겔: 다크 투어〉(2021)다. 《가상 정거장 Virtual Station프로그램 중 하나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온라인 게임 배틀 그라운드에서 진행된 투어 가이드로, 공식적으로는 “공공이벤트”로 소개됐다. 이 이벤트는 사전 예약을 통해 초대된 관객들이 게임에 참여하면서 시작된다. 통상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은 주어진 게임의 환경과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움직이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이 아무리 비현실적이고, 황당하고, 판타지적이더라도 이를 수용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게임 내에서 벌이는 활동이 ‘의미’를 얻기 때문이다. 배틀 그라운드 게임의 목표는 자기장이 좁혀오는 가운데 정해진 시간 안에 다른 경쟁자들을 죽이고 살아남아 최후 생존자에게 주어지는 ‘치킨’을 얻는 것이다. 이 게임에 접속한 유저들이 이 규칙을 받아들이는 한 게임 속에서 가능한 활동은,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을 경계하며 눈앞에 보이는 다른 캐릭터를 사살하고 살아남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게임의 플랫폼은 그것 말고도 더 많은 행위 가능성을 제공한다. 총에 맞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게임 속 건물이나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고, 지나가는 차에 동승하거나 내 차에 다른 이를 태워줄 수도 있고, 총이나 헬멧, 방탄조끼 없이 다른 이들과 함께 춤을 출 수도 있다. 수십 명의 참여자들과 함께 실시간으로 진행된 〈에란겔: 다크 투어〉는 그 가능성을 현실화시켰다. “우리가 대상과 상호 작용하고 그들과의 소통 속으로 진입하는 방식이 바로 디지털 환경에서 ‘우리’를 구성”11한다면, 이런 프로젝트는 온라인 게임 플랫폼이 새로운 종류의 연대를 위한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NFT와 새로운 ‘소유 감각’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경제학 철학 초고』(1844)에서 공산주의를 “인간의 자기소외인 사적 소유를 긍정적으로 지양하는 것”12이라 정의한다. 사적 소유가 인간의 자기소외 (Selbstentfremdung)인 이유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인간의 유적 본성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사적 소유는 대상에 대한 인간의 모든 감각들, 곧 만지고,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고, 맛보는 등의 다양한 감각들을 ‘갖는다’라는 소유 감각으로만 축소시켰다.13 사적 소유가 “우리를 멍청하고 일면적으로 만들어 버린 나머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 관계 하에서 “한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했을 때에만, 곧 그것이 우리를 위한 자본으로 존재하거나, 내가 그것을 먹거나 마시거나 내 몸에 지니거나 그 안에 살게 되거나 한 한에서만, 간단히 말해 우리에 의해 사용될 때에만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된다.”14

“한 대상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했을 때에만 ··· 간단히 말해, 우리에 의해 사용될 때에만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된다“고 말할 때 마르크스가 염두에 둔 건 ‘물질적 사물’이다. 내가 소유한 햄버거가 나에게 그 사용 가치를 실현시켜 주는 한, 곧 내가 먹음으로써 내 배를 채워주는 한 다른 사람은 이를 향유할 수 없다. 내 소유의 차를 타면서 내가 얻는 차의 사용 가치는 이를 소유하지 못한 타인에게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런 물질적 사물의 사용은 배타적 소유와 뗄 수 없이 결합돼 있다. 디지털 대상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내가 유튜브에서 음악을 듣고 영상을 보는 일은 다른 사람이 동시에 그 음악과 영상을 향유하는 것과 배타적이지 않다. 사적 소유가 한 대상을 배타적으로 소유함으로써 그에 대한 다른 사람의 향유를 가로막는다면 디지털 대상은 본성상 그러한 배타적 소유가 불가능하다. 디지털 대상의 향유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다. 오늘날에는 예술을 포함한 점점 더 많은 인간 행위와 대상이 데이터화돼 디지털 네트워크에 편입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기술이 다수의 대상과 인간 행위를 디지털 네트워크에 편입하기 이전 시대, 한 대상에 대한 누군가의 향유가 다른 이의 향유를 배제할 수밖에 없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가 말했던 ‘사적 소유’ 개념은 이제 다르게 정의돼야 한다. 물질적 사물의 사적 소유가 자신의 소유가 아닌 대상에 대한 타인의 감각적 접근 가능성을 차단한다면 무한한 복제 가능성과 실시간 스트리밍 기술로 여럿이 동시에 듣고, 보고, 즐길 수 있는 디지털 대상은 그들 모두의 동시적인 감각적 향유를 보장한다. 어쩌면 디지털 대상은 ‘공산주의적’ 본성을 가진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디지털 문화는 물질적 대상의 배타적 소유와는 다른 형태의 사적 소유를 출현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디지털 아이템의 소유다. 유저는 컴퓨터 게임 내부의 아이템을 획득 혹은 구매해 소유하며 이를 혼자서만 ‘사용’한다. 이와 유사하게 제페토(Zepeto) 등의 메타버스(Metaverse) 사용자는 자기 아바타를 꾸미기 위한 패션 아이템 등을 구매해 ‘소유’할 수 있다. 게임 아이템이나 아바타 패션 아이템의 ‘소유’는 전적으로 디지털 기술적 환경에 의존돼 있다. 스팀이나 제페토 계정에 보관되며 그 계정의 로그인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만 배타적으로 소유된다. 최근 이와는 또 다른 디지털 기반의 소유 형태가 등장했다.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NFT(Non Fungible Token)다. NFT는 한번 발행한 토큰의 경로가 모두에게 공유되며 변경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전의 실물 작품의 원본과는 전혀 다른 ‘디지털 원본’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NFT와 연동돼 있는 새로운 소유 감각의 문제만을 다룬다.

2021년 3월 비플(Beeple)이라는 예명을 사용하는 마이크 윈클맨(Mike Winkelmann)이 5천 개의 이미지들을 콜라주해 만든 디지털 이미지 〈Everydays〉가 6,900만 달러(약 780억 원)에 낙찰된 후 NFT 아트는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NFT 아트’라는 범주는 매우 포괄적이다. 대표적인 NFT 마켓 오픈씨(Opensea)의 ‘Art’ 카테고리에는 조야한 픽셀 이미지들에서 단순한 디지털 그래픽이나 ‘움짤’, 기존 회화의 디지털 스캔 이미지 등이 게시돼 있다. 그럼에도 2021년 상반기 NFT 시장은 2020년 상반기와 비교해 약 180배 이상 성장했고 올 8월 오픈씨의 NFT 거래 액수는 전 달에 비해 4배 이상 증가했다.15 이런 흐름에 편승해 기존 미술관들도 NFT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올해 7월 27일 간송 미술관은 소장 중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100개 한정판 NFT로 발행, 개당 1억 원에 판매하기 시작했고,16 비슷한 시기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State Hermitage Museum)은 소장 중인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나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작품을 NFT로 발행해 판매한다고 발표했다.17

NFT 작품을 구매한다는 것이 실물 작품의 구매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뿐 아니라 NFT 작품의 구매가 그 작품의 저작권이나 배타적 사용권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실물이 있는 작품의 NFT 구매에 그 실물 작품의 구매가 포함돼 있거나, 간송미술관이 하듯 훈민정음 NFT 구매자에게 비단 장정 목재 상자에 담긴 훈민정음 해례본 교예본 세트를 증정하거나, 미술관 주최 행사에 구매자를 초청하는 등의 혜택을 부가하기도 하지만 이는 NFT 작품 판매의 임의적 옵션들일 뿐 본질적으로 NFT 자체와는 무관하다. 이더리움 등의 가상화폐로 NFT를 구매하면 블록체인상 그 NFT의 고유 주소가 내 전자 지갑에 등록되고, 이더스캔(Etherscan)에서 그 NFT의 이력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디지털 계정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게임이나 아바타 아이템 같은 디지털 대상과도 유사해 보이지만, 내 소유의 NFT로는 게임에서 레벨 업을 하거나 아바타를 꾸미는 데 사용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대체 NFT를 소유한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 질문을 다룬 신문 칼럼18에서 정순형 ‘온더(Onther)’ 대표는 NFT의 이른바 ‘교환 가치’에서 답을 찾으면서 미국 기업 ‘루나 엠버시(Luna Embassy)’가 판매하는 ‘달 소유 증서’를 예시로 든다. 루나 엠버시는 달과 화성의 ‘소유 증서’를 판매한다. 루나 엠버시 코리아에 6만 5천 원을 지불하면 달 영토가 그려진 지도, 달 토지 1에이커(1,224평) 소유 증서와 멤버십 카드를 보내준다. 웹사이트에는 “사랑하는 이에게 달나라를 선물을 할 수 있는 기회!”라는 카피와 함께 장동민, 조현아, 강다니엘, 장나라, 장우혁 등의 유명인도 달 토지를 갖고 있다는 홍보물이 실렸다. 칼럼이 지적하듯, 루나 엠버시가 판매하는 ‘달 소유 증서’가 구매자에게 달 토지 소유권을 보장할 리 없다. 먼 훗날 인류가 달에 거주하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한 사기업이 발행한 등기 증서가 그 소유자에게 실질적인 달 토지 소유를 가능케 할 것이라 생각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달 소유 증서’를 구매하는 건 “달을 사서 친구나 연인에게 주는 로맨틱함이라든지, 현실에서는 혹은 생전에는 갖기 어렵지만 적은 비용으로 저 멀리 보이는 행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감성”19때문이다. 정순형 대표는 이를 “내재가치는 없지만 여러 맥락을 통해 확보한 교환가치”라고 정의하고 NFT 역시 그 자체의 내재 가치는 없어도 일정한 맥락을 확보하면 이런 ‘교환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내재 가치’, ‘교환 가치’라는 개념 사용이 혼란스럽긴 해도 이 칼럼은 NFT가 열어놓은 새로운 소유 감각의 핵심을 건드린다. NFT는 한 공동체가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의 비 배타적 소유권을 향유할 수 있게 해준다. NFT는 이 ‘비(非)배타적 소유권’의 향유와 관련된 새로운 소유 감각을 낳았다. 핵심은 ‘비배타적 소유권’이다. 한 대상의 소유가 타인의 소유를 배제하는 배타적 소유의 향유와는 달리, 디지털 대상에 의해 가능해진 비배타적 소유의 향유 가능성은 그 대상이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공유된 것일수록 커진다. 루나 앰버시는 ‘달 소유 증서’와 ‘화성 소유 증서’를 같은 가격에 판매하지만 이 중 전자의 판매량이 더 높으리라 확신할 수 있다. 지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화성에 비해 달은 거의 매일 누구나, 어디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고 또 모두가 알고 있는 대상이기에 ‘달 소유 증서’ 소유자는 매일 달을 볼 때마다 저 달의 명목상 소유를 자랑하거나 스스로 흐뭇해할 수 있다. 달에 대한 자신의 비배타적 소유권을 향유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NFT 아트의 양가성이 생겨난다. 더 많이 알려지고 공유된 것일수록 그 소유의 향유 가능성이 높아지기에 다빈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 등 유명 작가의 NFT 작품이나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 영상처럼 널리 알려진 이벤트 영상, 유명 연예인의 그림 등의 NFT가 높은 가격에 낙찰된다. 유명 작가일수록 자신의 NFT 작품을 비싼 가격에 판매할 가능성이 높고, 유명 작품들을 소장한 미술관일수록 그 작품들의 NFT로 돈을 벌 기회가 크다. 이 점에서 NFT는, 섣부른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기존의 위계적 질서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가능성도 있다. ‘달’에 의미를 부여해 온 인류라는 익명적 집합체 대신, 독자적인 가치와 의미를 공유하는 공동체에게 NFT는 그 공동체가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을 비배타적으로 소유하게 해줌으로써 공동체의 결속과 연대를 강화하는 매개체로 작동할 수 있다. 이 가능성은 다음 세 가지 디지털 네트워크의 기술적 특징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첫째, 누구든, 무엇이든 NFT로 민팅해 업로드할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 덕분에 갤러리스트나 딜러 등의 매개 없이 작가와 구매자 사이에 직접적 관계 맺음이 가능하다. 둘째, NFT는 작품의 재판매시 수익금의 일정비율을 원작자에게 배당하는 추급권(Resale Royalty Right)을 기술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 셋째, NFT 거래에 필수적인 전자 지갑에 그 소유자의 구매 및 수집 내역이 기록되고, 이것이 네트워크에 접속한 이들에게 공개됨으로써 취향과 관심을 둘러싼 공동체 형성의 매개로 작동할 수 있다. 단순한 고양이 일러스트레이션에 불과한 ‘크립토키티(CryptoKitties)’나 조야한 픽셀 이미지인 ‘크립토펑크(CryptoPunks)’ 계열의 NFT가 고가에 거래되는 현상은 그를 매개로 한 공동체와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한 공동체가 의미를 부여한 대상을 그 공동체 일원인 ‘내가 갖고 있음’을 향유하는 비배타적 소유 감각은, 내가 소유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향유를 배제하는 배타적 소유 감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비배타적 소유가 주는 향유는 공동체 내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대상을 알고 공유할수록 커지는데, 여기에는 그 공동체에 대한 참여적 결속감이 작동한다. 기존 미술 시장에서라면 전혀 거래 대상일 수 없던 것들이 사회, 정치, 문화적 맥락을 공유하는 공동체 내에서라면 NFT화돼 거래될 수 있고 이는 그 공동체의 정체성과 결속감 강화로 이어진다. 어쩌면 여기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존재 양식의 미술이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1. 이러한 경험들을 들려주신 서울문화재단 무용센터 강연 참여자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2. 부산현대미술관 VR전시를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2021년 8월 12일 검색).  

  3. Yuk Hui, 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6), 165. 

  4. Yuk Hui, ibid, 137. 

  5. Yuk Hui, ibid, 160. 

  6. 김재희, 「질베르 시몽동에서 기술과 정치」, 『철학연구』 108 (2015): 139.  

  7. Yuk Hui, ibid, 251.  

  8. Bernard Stiegler, “Forword,” 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6), xi. 

  9. Yuk Hui, ibid, 216. 

  10. Yuk Hui, ibid, 216. 

  11. Yuk Hui, ibid, 219. 

  12. Karl Marx,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Leipzig: Reclam, 1970), 184. 

  13. Karl Marx, ibid, 188. 

  14. Karl Marx, ibid, 189. 

  15. https://www.theblockcrypto.com/data/nft-non-fungible-tokens/nft-overview (2021년 8월 12일 검색) 

  16. ‘훈민정음 한정판 NFT’, 간송미술관 웹사이트. (2021년 8월 4일 검색)  

  17. 박범수, 「‘세계 3대 박물관’ 에르미타주, 다빈치·고흐 NFT 판매」, 『코인데스크 코리아』, 2021년 7월 28일. (2021년 8월 4일 검색)  

  18. 정순형, 「달을 등기하는 것과 예술작품을 NFT로 만드는 것의 공통점」, 『한국경제』, 2021년 6월 15일. (2021년 8월 4일 검색)  

  19. 정순형,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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