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소장의 지리학

김정현
김정현은 비평과 창작이 서로 개입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2015년 “퍼포먼스의 감염 경로는?―퍼포먼스 예술의 동시대성을 찾아서”로 제 1회 SeMA-하나 평론상을 공동 수상했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후쿠오카아시아미술관 등의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공저로 『멀리있는 방』(2016), 『비디오 포트레이트』(2017), 『침묵의 미래』(2020) 등이 있다.

서울에서 주로 활동하거나 거주. 미술 관련 전공으로 여행은 미술관 탐방과 거의 동의어. 국내 현대미술 관객 중에는 비슷한, 특히 두 번째 항목에 해당하는 경우가, 특히 이 글의 독자 중에는 많을 것이다. 언제부터 여행지에서 미술관을 찾아가는 게 익숙해졌을까? 1989년 한국에서 관광 목적의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이래로 내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여행지로 오랫동안 각광받아 온 서유럽의 파리와 런던과 같은 도시들을 소개하는 안내 책자에는 서구 문화의 중심 기관이자 단기 여행자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문화를 소개하는 장소로서 주요 미술관에 대한 소개가 비중 있게 다뤄져 있다. 루브르 미술관, 퐁피두센터, 영국 박물관, 테이트 미술관, 바다 건너 뉴욕 현대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등 서구 유럽과 북미의 주요 미술관은 전공자에 한정하지 않고, 해외여행의 대중적인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이런 사정이 모든 여행지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대중적 인기는 주로 ‘서양 미술 거장’에 관한 것으로, 국내를 포함한 비 서구 지역 미술관으로 눈을 돌려보면 관객의 정체는 다시 전공자 및 소수 애호가로 좁혀진다. 다만 적어도 2010년대 이래로 국내에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이름을 내세운 라이센스 전시가 예전처럼 특별히 각광받지는 않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비롯한 서울 도심지의 일부 미술관이 전시와 이벤트를 활발하게 운영하며 대중문화의 장소로 새롭게 부상했다.1 이 중 웹사이트에 나와 있는 표현을 따르자면 “국가 대표 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미술’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조직의 목표를 밝히는데,2 간략한 표현이나마 미술관의 ‘국가주의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3

국립현대미술관의 “국가 대표” 선언은 지역 미술관과의 협력을 한 가지 근거로 삼는다.4 그런데 이런 국가 및 지역 미술관 관계의 실제는 어떠한가? 중앙 정부 모델의 획일적인 지방 보급으로 이루어지거나, 지역적 특수의 총합이나 부분적 포용으로 국가적 보편을 정의하고 있지는 않은가? 국립현대미술관의 ‘국가주의’가 또 다른 배타적이고 단일한 보편으로서의 ‘한국미술’의 구성과 일방적인 전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계급, 종교, 인종(민족), 페미니즘, 도시 등에 관한 복수성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이 글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사례에 집중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한국미술의 국가주의적 이념을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대신 또는 그에 앞서 ‘한국 내 미술’의 내적 복합성과 역동을 밝히기 위해 ‘지역’이라는 개념에 주목하고, 다양한 지역 공립 미술관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즉, 우선 ‘지역’의 스케일을 지구적인 것에서 도시의 차원으로 축소하는 방법을 취한다. 또한, 미술관이 저마다 바쁘게 선보이는 전시, 교육, 이벤트 프로그램보다 일반적으로 미술관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진 소장5과 소장품에 주목한다. 2020~2021년 사이에 수행한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내 6개 공립 미술관 답사 및 인터뷰 연구6를 통해 수집한 자료와 정보를 바탕으로 소장품에 대한 여러 미술관의 자기 인식의 상황과 미학적 실천의 방향, 그리고 이들 사이의 비교를 통한 미술관 소장의 지리학을 탐구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가끔 국내 여행을 하면서 들렀을 수도 있지만 미술(관) 관계자가 아닌 한 반드시 찾아가는 곳은 아닌 지역 미술관의 시점으로 전환해 보는 것이다.

부재 ― 가능성과 한계

대조적인 두 가지 사례에서 시작해 보자.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개관하면서 국내 최초로 개방형 수장고가 등장했다. 수장고형 미술관은 신선한 시각적 형식에 비해 미학적 실험 및 역사적 방법론으로서 가능성이 명확하게 증명된 적은 없으나 국내의 여러 지역, 특히 박물관에서 새로운 전시 모델로 주목받으며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또 다른 국내 첫 사례로, 2019년 경기도미술관에서 퍼포먼스 또는 개념으로서의 미술 작품을 소장하기 시작했다. 2019년에는 1차로 1960~80년대의 주된 퍼포먼스 양식인 작가의 1인 퍼포먼스를 타인이 재연할 수 있도록 하는 스코어를, 2020년에는 대상을 급진적으로 확장해 다수의 퍼포머가 출연하고 안무의 개념 등이 포함된 공연에 가까운 라이브 퍼포먼스를 구입했다. 앞서 언급한 개방형 수장고의 경우와 달리, 개념 및 퍼포먼스의 소장은 당분간 국내 다른 지역 미술관에서 수용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예외적으로 서울시립미술관이 2020년에 퍼포먼스 수집을 시작했다.)

최근의 눈에 띄는 현상으로서 국내에서 새롭게 부상한 소장품 전시 양식과 소장의 제한적이지만 새로운 대상을 나란히 두고 보니 먼저 떠오르는 것은 비평 담론의 부족이다. 박물관을 제외하고 소장품의 역사성과 규모의 차원에서 중심이 되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장품의 수집과 활용에 관한 제도의 형성 및 연구를 주도해 왔다. 한편, 소장품 전시는 특별 기획전처럼 관객으로부터 특수하게 주목받지 못하고, 기본적으로는 기관의 구조적인 한계로 인해 대다수 공립미술관에서 체계적인 연구 없이 관례적으로 개최되며 진지한 비평의 대상으로 취급받지 못했다. 그러한 고질적인 한계(의 극복을 기다릴 틈 없이)와 별개로 최근의 현상은 또 다른 차원에서 담론의 형성을 요구한다. 많이 알려졌다시피, 상기한 두 가지 소장 행위는 모두 서구 미술관의 15년 이상 앞선 선례를 따른다. 그러나 ‘비 서구’, 국내 미술관의 뒤늦은 탄생 및 압축적인 발전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소장 패러다임의 도입 역시, 문화적으로 번역됨과 동시에 새로운 양상을 나타낸다. 무엇보다 개방형 수장고나 라이브 아트로서의 퍼포먼스의 소장은 먼저 도입한 지역들에서도 이론적으로 확립되지 못하고 계속 탐색 중인 진행형 모델인 것이다.

때마침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의 주도로 소장에 관한 연구가 새롭게 활발해지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청주관 개관과 함께 소장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 〈미술관은 무엇을 수집하는가?〉(2018)를 기획했다. 미술관의 주요 역할이자 행위 중 하나로서, 첫 번째 의제인 ‘연구(research)’에 이어 두 번째로 ‘수집(collecting)’이라는 의제를 제시한 것이다. 세부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미술관과 타자의 수집’, ‘미술관 수집의 전략과 재매개’로 나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2020년 ‘수집’을 미술관 의제로 삼으며 〈소유에서 공유로, 유물에서 비트로〉라는 심포지엄을 기획했고, 소장품에 관한 제도적 연구와 함께 디지털 환경 및 비물질적 소장에 주목했다. 이러한 기획들은 국내 및 다양한 해외 미술관 등 기관의 사례를 알리고, ‘타자성’, ‘아카이브’, ‘디지털’과 같은 소장에 관한 동시대적 화두를 강조하고 가시화한다.

미술관(museum)의 탄생의 역사 상 소장품은 “걸작들을 향한 변치 않는 찬미와 예술가들이 실력을 연마하기 위해 따라야 할 전범들의 항구성”7을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한 18세기 박물관(museum)의 이념을 대표적으로 근현대 미술에 확장해 더욱 심화된 서구 중심주의로 적용해 낸 뉴욕 현대미술관이 2019년 재개관 프로젝트8를 통해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변화의 시도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서구 미술관 중 그보다 실질적이고 지속적으로 서구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해온 경우는 많이 있지만, 가장 가부장적이고 서구 중심적인 것으로 알려진 기관의 대대적인 변화가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서구의 주요 미술관이 점점 더 유럽과 미국 중심주의를 반성적으로 의식하며 미술의 국제주의를 업데이트해 나가는 동안에, 아시아의 미술관들은 탈식민주의 담론에 정초해 초국가적 미술관을 표방하며 다양하게 ‘아시아’를 집중 조명하는 기획을 선보이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2019)를 공동 기획한 도쿄 국립 근대미술관 큐레이터 스즈키 가츠오(Suzuki Katsuo)는 서양 주류 미술사를 참조하는 데서 벗어나 아시아 지역 미술 사이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드러내는 기획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어서 그동안 아시아 지역 연구의 한계로서 “시대의 변화라는 요소가 누락”되는 문제를 지적한다. 특정한 서구적 미학 개념이 아시아 각 지역에 시차를 두고 적용됐을 뿐만 아니라 개별 지역 내에서도 몇 차례의 변용의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 따라서 시간의 차원에서 아시아의 “고유한 맥락”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9

그 자체로는 매우 타당해 보이는 관점이지만 아시아라는 새로운 지리적 공간을 상상하는 과정에서 시간적 구체성에 비해 공간적 구체성에 대한 관심이 누락되는 매우 ‘흥미로운’ 한계가 발견된다. 보편으로서의 서구를 반대하며 아시아라는 ‘지역’에 주목하고, 아시아의 상호 연결에 있어 개별 ‘지역’ 국가의 시간적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여전히 지역의 최소 단위를 ‘국가’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개별 국가의 시간적 특수성 안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공간성, 변화무쌍한 장소성에 대한 인식이 누락된다. 시간의 불연속성과 변동성에 비해 공간은 고정되고 불변한다고 믿는 근대 공간학의 관점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복수 주체의 아시아 담론 형성 초기 과정에서 수도 중심주의 및 ‘국가 대표 미술관’ 중심의 교류가 빚어 낼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오류일까? 앞서 언급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심포지엄 세부 주제 중 ‘미술관과 타자의 수집’ 섹션에 포함된 국내 발제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수집 제도사에 관한 글은 미술관의 보수적인 정책 상 ‘아직’ 수집 대상이 되지 못한 국내의 다양한 미술이 ‘타자화’됐다고 서술하며 ‘타자성’이라는 주제를 다소 피상적으로 언급하는 데 그친다.10 국제주의, 초국가주의, 동시대성 등에 대한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논의의 과정에서 국민 국가 미술의 시대는 대체로 지났다고 해야겠지만, 수집 제도 및 소장에 관한 타자성의 정치학 없이 기관이 국가주의의 그늘을 일부 관련 기획에서의 누락이나 행정 관료주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국가 ‘전체’를 대표하는 미술의 단일한 보편적 공간으로 순진하게 인식되고 있다면, 그것은 국내 유일이라는 입지 때문일까? 전국의 수많은 공립 미술관 중 수도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은 수집 심포지엄에서 마찬가지로 해당 미술관에 관한 수집 제도사를 논하면서 동시에 지역 공립 미술관들이라는 다른 주체를 비교한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003년에 시작한 ‘수집 공모제’가 전국적으로 유사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주지하며, 이로 인해 “미술관별로 굳어진 대상 작품이 대동소이해지고, 결국 각 미술관 소장품마다 차별성이 없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11 국내 공립 미술관이 대부분 공통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수집 공모제는 학예연구사 추천제에 비해 분명 각기 다른 미술관의 관점을 반영하기 어렵다.12 이러한 공립 미술관의 사정을 고려할 때 ‘소장품이 미술관의 정체성’이라는 말은 실체가 없게 들리는 게 사실이다. 결국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내 대다수 공립미술관이 각각 보수적이고 대중추수적인 수집 제도로 인해 특성 없이 닮아있는 ‘기형적인 정상성’을 지니게 됐다.

미술관의 자기 정의

이러한 결론에 일부 진실이 포함돼 있더라도, 개별 공립 미술관의 전체 소장품 구성을 구체적으로 분석해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성급한 일반화에 그칠 것이다. 적게는 1,000점에서 5,000점에 이르는 공립 미술관의 방대한 소장품을 개인이 일일이 분석하는 일은 지나치게 비효율적일뿐더러 가능하지 않다. 이는 우선 미술관 주체의 과제다. 가장 간단하게는 미술관의 웹사이트에 소장 작품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를 밝히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소장품의 가치나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한 가지 타당한 접근 방식으로서 ‘소장품 선집’이라는 형식이 눈에 띈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 2020년 대구미술관에서 소장품 선집 『소장품 100선』을 발행했다. 같은 해 상반기에 100선에 포함된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를 개최했고, 소속 학예연구사 9인과 외부 필진 1인이 작품별 해제를 작성해 국영문으로 수록한 도록 겸 단행본을 제작했다. 2011년에 개관한 대구미술관은 이 글에서 살펴볼 6개 공립미술관 중 서울시립미술관(1988)과 광주시립미술관(1992)은 물론 경기도미술관(2006)에 비해 개관이 가장 늦은 편에 속한다. 그럼에도, 올해 초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아카이브 전시 《첫 번째 10년》(2021)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직 길지는 않지만 우선 미술관의 역사를 통해 미술관의 정체성을 구상해 보려는 자기 정의에 대한 의지가 강하게 엿보인다. 사실 대구미술관에는 2019년 말에 ‘아키비스트’ 전담 인력이 채용돼 그간 학예연구사가 간신히 병행하거나 거의 손을 대지 못했던 주요 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즉, 전시나 연구 기획을 통한 미술관의 자기 정의란 단지 의지가 문제가 아니라 적절한 인력과 자원의 배치가 수반돼야 하는 것이다.

국내 미술관의 소장품 선집은 당연하게도 역사가 오래된 국립현대미술관이 가장 먼저 제작했다. 2000년대 이후로만 한정해도 2004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선집』과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300』이 있다. 2019년판은 소속 학예연구사들이 해제를 작성하여 국문판과 영문판을 별도로 출간했다. 이어서 서울시립미술관이 『SeMA Collection 200』(2015)과 『SeMA 소장품 가나아트 컬렉션』(2018)을 출간했는데, 2015년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소장 작품 연구 협력프로젝트’로 학예연구사 이외에도 외부 연구자들이 작품별 해제를 함께 작성했다. 경기도미술관은 『GMoMA 컬렉션 하이라이트』(2018)에서 소속 학예연구사 9인이 작품별 해제를 작성해서 국영문으로 수록했다. (이 글의 참조 대상은 아니지만 같은 경기도 지역의 현대미술관인 백남준아트센터에서도 『백남준아트센터 소장품 하이라이트』(2019)를 펴내고 전현직 소속 학예연구사 3인이 작품별 해제 작성하여 국영문 수록했다.) 이처럼 2015년 이후로 공립 미술관의 소장품 선집 발행은 소장품 기획에 관한 대표적인 행위로 자리 잡았다.

서울 이외에 전국 공립 미술관 중 소장품 규모가 가장 큰 광주시립미술관은 의외로 미술관 전체 소장품에 관한 선집을 제작한 적이 없다. 소장품의 절반을 차지하는 하정웅 기증작에 관해서만 『하정웅컬렉션 2012–2018』(2020)을 포함해 기증 시점별 기념 선집을 발행했을 뿐이다. 그나마 작품별 해제 없이 화집에 가까운 형식이라 소장품에 관한 미술관 내부의 연구 현황과 관점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하다. 1998년 동시에 개관한 대전시립미술관과 부산시립미술관은 아직 소장품 선집을 발간한 적이 없다. 이렇게 세 곳의 미술관은 웹사이트에 전체 소장품에 관한 개요 정보와 작품 설명을 제공하지만, 전체 정보를 제공하는 것보다 학예팀의 논의를 거쳐 선별한 작품과 필자를 밝힌 해제를 공유하는 편이 소장품을 통한 미술관의 인식 표명에 적절해 보인다.

필수 전담 인력이 부재한 조직의 구조와 예산의 불안정성과 같은 한계를 고려할 때, 연구 전문직을 두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미술관에서 소장품에 관한 기획과 담론을 적극적으로 펼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을 중심으로 한국 내 미술의 수도 중심주의가 심각한 상황에서 소장품 담론 형성마저 미진하다면, 전체로서의 한국미술과 유행으로서의 동시대 미술과 같이 상투적이고 피상적인 프레임을 앞으로도 한참 동안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역-미술과 행정 구역의 관계

동시대 현실에 맞는 소장품 담론의 부재와 미술의 영역에서도 예외가 없는 문화의 수도 중심주의. 더욱 심각한 것은 이에 따라 지역 공립 미술관이 미술관의 정체성을 ‘지역사’와 단순하게 동일시하는 증후적인 인식이 일반화되는 것이다. 국내 지역 미술관의 수집 제도를 살펴보면,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정종효의 지적대로 “미술관별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이나 범위 설정이 되어있지 않고 각 미술관의 지역성을 많이 반영하기 위한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각 미술관에서는 지역의 미술사와 지역의 미술현장을 정립하는 것이 미술관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우선 과제임을 인식하고 있다고 분석된다.”13

지역 미술 조명을 공통의 과제로 하는 대부분의 지역 공립 미술관 중에서도 독보적일만큼 지속적인 기획과 연구를 보여 준 대전시립미술관은 최근에도 《대전미술 다시쓰기》(2019~2020) 프로젝트를 수행했다.14 연구자로 참여한 미술평론가 허나영의 글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대전지역 실험미술의 한 가지 사례로 1980년에 시작된 《금강현대미술제》와 1981년 창립된 야투(野投)는 2004년부터 한국자연미술미술가협회가 ‘금강자연비엔날레’라는 이름으로 공주 지역을 중심으로 개최하고 있다. 필자는 1980년대에 공주와 대전이 충청남도라는 하나의 행정 구역이었으며, 실제 야투에 가입한 작가들 중 ‘공주 작가’ 못지않게 ‘대전 작가’가 많았다고 언급하며, “1989년 대전이 직할시가 되면서 충청남도와 분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1990년대 이후에는 대전미술로 포함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이러한 지점이 지역미술 연구에 있어서 고민이 되는 지점”이라고 밝힌다.15 이러한 서술을 통해 ‘지역 미술’이라는 연구 과제에서 행정 구역별 ‘분리’가 의심 없이 전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술적 현상을 행정 구역에 맞춰 서술해 내려는 의지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문학/문화비평가 박훈하는 “단일하게 통합되어 있는 듯 여겨졌던 한국의 화단이 마치 자율적이고도 다양한 지역 화단으로 구성된 듯 보도되고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분명 80년대 이후”라며, “포디즘이 확산됨에 따라 정치 경제 구조의 하부단위로서 ‘지역’이 생산되기 시작한 시기와 그대로 맞물리며, 그것은 또한 체제 재생산 수단으로서의 지방대학의 양산, 특히 지역의 미술대학 설립이 가져온 미술전문 인력의 확대와 직접적 관련을 갖는다”고 분석한다.16 그러면서 당시의 “지역적 표현과 발언들의 기저에는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지역성의 개념과 가치”로서, “현재의 탈근대화된 조건 속에서 이를 물질적으로 체화하고, 그럼으로써 이 모순을 지양할 실천적 거점으로서의 지역성, 타자성으로서의 locality”와 “무관하거나 오히려 역행하는 불순한 욕망이 내재”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비판적인 의식은 해당 글이 발표된 부산시립미술관의 《1960–80년대 부산미술》(2020) 기획뿐 아니라, 다른 많은 지역 미술관의 역사 서술에서도 중요하게 참고해야 한다.

전체로서의 국가를 표상하기 위한 지역적 분업의 기점으로서의 지역 미술관 모델은 매우 퇴행적이다. 그러나 이를 지역 미술사 정립의 과정에서 불가피한 ‘자본의 재영토화’라고 일괄적으로 치부하기에는 지역 미술사 정립의 프레임 자체가 지나치게 배타적으로 설정돼 있다. 앞서 언급한 대전과 부산의 최근 지역 미술 다시보기 기획은 예술경영센터의 《다시, 바로, 함께, 한국미술–지역미술 다시보기》 시리즈로 연구 지원을 받았다. 그 외에 광주시립미술관도 같은 시리즈를 개최했으며, 앞으로 다른 지역 미술관으로 기획이 이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그동안의 흐름을 보면 예산 문제가 없는 한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렇게 미술 현상을 ‘지역’, 여기서는 행정 구역별로 분리된 특수한 것으로 논하도록 하는 기획은 앞서 허나영이 마주했던 가상의 미학-정치적 장벽을 부지불식간에 기정사실화 해버린다.

이동하는 정체성

‘지역’의 개념은 어떻게 비판적으로 상상되고 재전유될 수 있을까? 앞서 ‘실천적 거점이자 타자성으로서의 지역성’을 언급한 박훈하는 “미술 혹은 예술로 명명해 준 가치생산체계 … 이에 저항하고 전복함으로써 … 지역미술은 단독자의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자율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발언은 예술의 보편적 가치 생산 체계상의 분업 명령에 대한 파업 선언, 일종의 강경한 ‘분리주의’로 해석된다. 그러나 여기서 수도나 국제적인 것으로 표상되는 보편에 대한 반대가 역설적으로 다시 지역을 특권화하는 결과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지역적 고유성을 긍정하면서 저항의 제스처로 자발적 고립을 택하는 것은 매우 낭만적으로 채색된 모더니즘적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지역’이 평평한 지도 위에 선을 그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던 때도 있다. 그렇게 고립된 물리적인 장소의 덩어리가 그 자신의 내적 고유성을 지닌다고 여겨지던 시절 말이다. 장소가 고정된 것이라는 관념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근대 학문은 공간, 장소, 시간에 개념적 위계와 이분법적 관계를 부여한다. 먼저 공간과 장소의 관계에서, 공간은 장소보다 넓고 보편적인 것이며, 장소는 그보다 좁고 지방적이며 영향력이 약한 것이다. 공간과 시간의 관계에서, 공간은 고정되고 탈정치화된 추상적인 것이며, 시간은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이며 따라서 정치적 가능성을 지니는 개념이다. 이러한 본질주의적 정의는 현실과의 괴리 및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의 확산에 의해 점차 극복된 것 같지만, 개별 지역 현실의 층위에서 여전히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다. 특히 시간의 개념에 비해 공간과 장소의 개념은 여러 영역에서 여전히 고정되고 경계 지어진 것으로 인식된다.

비판지리학자 도린 매시(Doreen Massey)에 의하면 가장 보편적으로 인식돼 온 “‘공간적인 것’은 모든 공간적 스케일, 즉 금융과 통신의 지구적인 확장에서부터 국가적 정치 권력의 지리라는 촉수들을 거쳐 지역 사회나 마을, 가구, 직장에서의 사회적 관계에 이르기까지 여러 스케일에 걸쳐 있는 사회적 관계의 복수성으로부터 구축”된다.17 공간은 수많은 구체적 장소와 사회적 관계가 중첩된 개념이다. 장소 역시 단일하게 규정할 수 없기에, 사회적 관계가 이뤄지는 어느 공간의 특정한 순간을 일컫는 것으로 정의되거나, 장소의 내부뿐 아니라 외부와의 공간적인 상호 관계를 통해 변화무쌍하고 복수적인 정체성을 지니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장소를 알(아보)기 쉽게 고정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는다. 한 지역의 미술관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가장 간편하게 채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한된 지역 내 공간(미술 학교나 갤러리)과 사회관계(집단 운동, 단체전)에 집중해서 ‘××(지역)+미술’의 공식 역사를 서술하려는 많은 시도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정체성에 관한 공간과 장소의 인식에서 복수성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을까? 2020년 대전시립미술관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42점으로 구성한 기획전 《이것에 대하여》는 한 가지 단서를 준다. 이 전시는 지역 개념을 두 가지 차원에서 ‘외부’와 접합한다. 첫째,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중 ‘동시대 해외 현대미술’ 카테고리의 작업에 주목하고, 한국 현대미술과 맞물려 서양 현대미술이 어떻게 “맥락화”하는지 질문한다.18 동시대적이고 국제적인 현대미술의 주요한 특성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에서도 간소하나마 반영이 됐고, 구체적인 소장품의 면면을 살펴봄으로써 ‘동시대 해외 현대미술’의 ‘보편적’ 서사와 대조되는 ‘지역적’인 서사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소장품을 눈앞에 펼쳐놓고 보면 예산과 행정을 비롯해 미학적이고 역사적인 평가와 무관하게 다소 우연적이고 불규칙하게 수용된 결과가 과장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혹은 그럼으로써 소장품이 미술관의 정체성을 대표한다는 가설 또는 그렇게 하려는 변함없는 의지 하에, 이 기획은 국가주의적 표피 아래 은폐되고 잠재돼 있던 혼종적 서사를 집중적으로 의식하게 만든다.

둘째, 더욱 큰 단위로서의 국립 기관과 그것의 부속은 아니지만 하위 단위로서의 지역 공립 기관. 그 관계에서 대전시립미술관이 협력을 주도해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을 직접 기획했다는 점. 대부분 국공립 미술관 협력망 사업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은 더욱 규모가 크고 전문화된 기관으로서 다른 기관에 도움을 주는 입장에 서 왔다. 그 중 소장품은 작품 관리 문제로 제한적으로 대여해 주는 데 그쳤고, 대체로 자체 기획한 소장품 전시를 지역 순회하는 차원에서 일방향적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수십여 점의 소장품을 외부 기관의 기획에 이렇게 개방한 사례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대전시립미술관은 2018년 국내 공립 미술관으로는 최초로, 2021년 여름, 현재까지도 유일하게 보존 및 관리 전문 인력 1인을 채용했다. 컨서베이터(conservator)의 존재는 쉽지 않은 기획을 성사시키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 지원이 뒷받침돼야겠지만, 소장품에 관해 지역과 국가라는 공간적 단위의 스케일을 위계적 측면에서 벗어나 상호 관계의 차원에서 재구축한 사례로 눈여겨 볼만하다.

행정 구역에 착근된 지역 미술에서의 지역 개념은 국제주의의 차원에서는 이미 꽤나 개방적인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지역별로 간헐적이거나 주기적으로 개최하는 국제 미술 행사를 계기로 구입한 해외 미술 소장품이 수장고에 간간히 섞여 있으며, 해외 작가나 해외 미술관과의 국제 교류 전시가 소장품 교류전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열리는 편이다. 그러나 그렇게 포함된 소장품과 기획들이 지역 미술관의 정체성과 긴밀하게 상관된 것으로 논의되지 못했던 것은, 미술관의 기획과 연구 인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현실적 제약. 결과적으로 소장품 기획이 관례화되고 주변화되는 문제도 있을뿐더러 지역의 개념이 여전히 국가주의의 범주 내에서 본질주의적으로 기술되고 있는 탓이 크다.

장소와 장소에 속한 인간을 분리해서 생각해 보자. 그러한 인간, 인간들이 맺는 사회적 관계, 사회적 관계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공간, 크고 작은 스케일의 공간이 끊임없이 접합하며 형성되는 장소의 개념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계속해서 변화한다. 여기서 지역 공립 미술관 사이의 ‘관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국가(전체, 통합) 및 지역(지방, 부분)의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정의에서 벗어나는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미술관 사이의 ‘소장품 교류전’은 서로 다른 지역의 역사, 정치, 시각성 등을 중첩시켜 복수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국내의 경우 의외로 지역 미술관 사이의 협력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2015년 전국 시도립 네트워크 사업의 일환으로 8개 미술관에서 공동 개최한 《위대한 유산》전은 전국 5개 시도립 미술관이 소장한 하정웅 컬렉션 240여 점으로 구성했다.19 기증 기념전에 가까운 이 전시는 서로 다른 미술관이 보유한 소장품의 맥락적인 기획 및 연구보다는 방대한 컬렉션의 집합에 그친 듯하다. 2020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이 주도하여 대구미술관과 공동 기획한 ‘달빛동맹’ 교류전 《달이 떴다고》가 열렸다. 광주시립미술관과 대구미술관이 각각 특화된 영역으로 알려진 한국화와 한국근대미술 소장품을 중심으로 관련 작업을 서로 확장해서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도록에 실린 글들을 보면 “한국의 지형적, 역사적 대척점”에 있던 두 도시가 자기 지역의 대표적인 미술을 상대와 공유한다는 인식,20 각자는 여전히 서로 분리된 독립적인 정체성을 지니는 것으로 논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타자성’에 대한 사유가 부재한 선명한 두 ‘자율적’ 주체의 만남. 단순한 지역 연계, 통합의 기획만으로는 소장품의 이동하는 정체성을 상상하고 포착할 수 없다.

메타 연구의 사연과 필연

‘수도권’은 상대적으로 지역의 특권화나 지역성의 재정립이라는 과제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지역적 정체성의 정치학에서 해방되거나 소외됐다고 할 수 있다. 대신, 다시 ‘국가’ 단위의 보편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동참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자신의 지리적 정체성을 어떻게 서술할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서울시립미술관과 경기도미술관의 소장품 관련 기획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으며, 그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미술관의 자기 인식이란 어떤 것인가?

먼저, 서울시립미술관은 전국의 공립 미술관 중 수도 입지에 맞게 가장 먼저 건립(1988)됐으며, 예산이 가장 많이 투입되는 기관이다. 보유 소장품 규모도 가장 크다. 그에 비해 ‘수도권’으로 함께 묶어 칭했지만 경기도미술관은 건립 시기(2006)도 늦고, 2010년에서 2018년까지 소장품 구입 예산이 배정되지 않아 소장품 규모도 작은 편이다. 그럼에도 소장품 선집 발간(2018)이나 웹사이트 내 소장품 하이라이트 정보 공개 등 기본적인 정리 및 정의는 빠르게 완료된 상태다. 최근에는 가장 먼저 퍼포먼스 소장을 시작(2019~)해서, 미술관의 소장이라는 행위에 내재한 동시대적 화두를 적극적으로 가시화하고 있다. 퍼포먼스의 소장은 서울시립미술관의 사례(2020~)와 함께 국내 공립 미술관에서 어떻게 지속 및 확장되고, 동시대 미술에 관한 담론 형성에 관련될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경기도미술관은 소장품에 관한 흥미로운 기획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2012년 카이스트와 협력해 기획한 《미술에 꼬리달기》 전시는 국내 국공립 미술관 중에서 매우 이른 시기에 온라인을 활용한 소장품 기획 사례다. 전시 오픈 전, ‘태그 클라우드(tag cloud)’ 기술을 이용해 3주간 온라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미술관 웹사이트에 접속한 방문자들이 미술관의 소장품 페이지에서 200여 점의 작품을 감상하고 연상되는 단어를 입력하도록 한다. 이렇게 대중의 참여를 통해 작품을 선별해 전시를 구성했고, 태그 클라우드로 수집한 단어들은 웹사이트의 소장품 페이지에 태그로 남겨 계속 표시되도록 한다.21 고독, 외로움, 기억, 환상, 바다, 여성 등과 같이 다소 산만하고 상투적인 표현이 많지만, 회화, 조각, 사진, 설치와 같이 소장품 정보를 매체 중심으로 분류해서 관리하는 미술관의 관습을 이렇게 벗어난다.

그 선례로 영국의 테이트(Tate)가 골드스미스(Goldsmiths) 대학교의 컴퓨팅학과 및 리버흄(Leverhulme) 미디어 연구소와 협력해 추진한 메타데이터 프로젝트컬처 마이닝(Culture Mining)》(2005~2010)을 비교할 수 있다. 테이트는 일반적으로 매체별로 분류된 소장 작품 정보를 포함해서 미술관 웹사이트에 쌓인 시청각 콘텐츠를 미술관의 새로운 유산으로 인식했다. 이제 웹사이트의 작품 정보 아래에는 “Explore” 메뉴로 상위 분류에 감정, 여가활동, 사람들, 하위 분류에 모호함, 독서, 스탠딩, 성인, 그룹 등과 같은 태그 링크가 연결됐다. 이렇게 시간, 강도(intensity), 협업 기반의 태깅 및 검색 기능 장착을 통해 미술관의 온라인 데이터 접근에 관한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소장품’에 관한 인식 변화 또한 자연스럽게 수반될 것이다. 미술관의 관리 체계 중심으로 분류됐던 소장품은 관객 및 사용자의 관심 기준으로 재분류된다. 경기도미술관의 기획은 테이트 프로젝트와 유사한 실험적인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지만, 연구를 위한 장기적인 지원 체제의 부재로 좀 더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무수한 아이디어들이 어떻게 하면 단편적인 시도에 그치지 않고 미술에 대한 의미 있는 관점의 변화를 가시화하고 파급할 만큼 발전할 수 있을까.

서울시립미술관은 비교적 자원이 풍부한 입지를 활용해 소장품에 관한 장기 연구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이 글의 발단을 제공한 데서도 알 수 있듯 소장에 관한 담론 구축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인다. 2015년에 시작한 소장품 연구 프로젝트는 최근에 열린 소장품 기획전 《컬렉션_오픈 해킹 채굴》(2021)에서 다시 한 번 환기된다. 미술관을 구성하는 각기 다른 주체, 즉 관객, 작가, 연구자가 소장품에 접근하도록 해 그 결과물을 오프라인에 전시하고 연구 내용은 온라인에 별도 웹사이트를 만들어 공유했다. 서소문 본관 2~3층을 가득 메운 결과물은 낱개로 떨어트려 놓고 보면 종종 이런저런 기획에서 볼 수 있던 아이디어와 정보이지만, 그것의 집합적인 전시 및 전체 구성을 고려하면 소장품에 관한 미술관의 메타 연구 기획의 욕망이 매우 선명하게 그려진다. ‘가시화’라는 차원에서 볼 때 꽤나 직접적인 가시화에 도달해서, 전시장에는 연구자들의 글이 작품을 압도하며 벽과 바닥을 가로지르는 월 텍스트로 펼쳐지고, 소장품 관리에 관한 ‘돌출 데이터’의 사례로 가장 처음 구매한 작품이나 가장 고가의 작품과 같은 정보가 그리드(grid)로 구획한 작품의 공간에 제목처럼 새겨진다.

메타 연구의 욕망을 보면 양가감정이 든다. 아마도 이 글 역시 피해갈 수 없을 문제로, 메타 연구에 선행돼야 할 연구들의 부재하는 지형이 부각되는 것이다. 위 전시에 참여한 연구자 중 김장언은 “동시대성의 빠른 포섭은 어쩌면 작가들의 발 빠른 공모지원능력과 그에 수반한 당시 심의위원들의 임시적 대처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도 모른다”며 소장의 행정적 민주주의화에 우려를 표한다.22 국내 공립 미술관의 그리 길지 않은 소장의 역사와 결과를 보면 마찬가지로 임시변통의 후유증이 심각하게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미술관을 둘러싼 주체들의 분투의 흔적들이 있다. 주체들은 그들이 속한 구조들의 획일성에 포획돼 있거나 개인으로 고립돼 있기도 하지만 은밀하게 연결돼 있기도 하다. 소장품에 남아있는 작가나 시대의 의식도 단 한 순간에 고정돼 있기도 하고, 그것에 내재했거나 이질적인 것들과의 마주침에 의해 생겨난 타자성에 의해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기도 하다. 이 글은 관객의 물리적 이동의 궤적에 따라 반복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특정하거나 특정하지 않은 소장 작품 및 기획을 미술의 소장의 지리학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봤다. 각기 고립돼 지극히 소수에게만 단편적으로 회자되고 곧 잊히고 마는 시도들을 들여다보며, 상호 연결의 지리학을 따라 중요한 순간들을 포착하고 기록하고자 했다.


  1. “최근 2~3년 사이 문화예술 관람 트렌드를 주도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변화 양상에 주목하고, 전시를 포함한 ‘경험’ 공간으로 미술관을 확장시켜가고 있다. 이들이 주로 애용하는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통한 소통 강화, 디제잉·공연 등 금요일 야간 행사, 책방 작담, 열린강좌 등을 보다 강화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홍보관의 발언. 전지현, 「20대 문화예술 성지로 부상한 미술관」, 『매일경제』, 2020년 1월 16일, 재인용.  

  2. 국립현대미술관 웹사이트 내 “조직과 미션” 메뉴 중 세 번째 “전략목표” 제목에 사용된 표현. (2021년 7월 6일 검색) 

  3. “조직과 미션” 메뉴 중 첫 번째 “전략목표”인 “핵심기능의 심화·확장으로 세계적 미술관 도모”의 네 번째 세부 항목 “한국미술의 해외 확산 및 유통.” 

  4. “조직과 미션” 세 번째 “전략목표” 중 첫 번째 세부 항목 “지역미술관 지원 확대 및 역량 강화.” 

  5. ‘Collecting’은 ‘소장(所藏)’ 이외에도 ‘수집(蒐集)’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미술관의 ‘수집’ 행위는 ‘한국’ 또는 ‘세계’와 같이 제각기 표방하는 규모의 지역적 정체성 및 건축적 규모로 축적된 대상의 물질적 차원에서 공간 및 장소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글에서 ‘소장’은 수집 행위 이후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포함하는 좀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제시된다. 

  6. 이 연구는 202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공예술 지원사업 연구부문의 지원을 받아 수행했다. 

  7. 도미니크 풀로, 『박물관의 탄생』, 김한결 옮김 (돌베개, 2014), 14. 

  8. 강종훈, 「10월 재개관 MoMA “다양한 지역과 소통”…양혜규 작품 전시」, 『연합뉴스』, 2019년 4월 16일.  

  9. 스즈키 가즈오, 「초국가적 미술사를 향한 도전: 전시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의 방법론」, 『국립현대미술관 연구』 11 (2019), 23. 

  10. 장엽, 「국립현대미술관은 무엇을 수집하는가」, 『국립현대미술관 연구』 11 (2019), 68. 

  11. 김아영, 「복합적 동시대성을 구현하는 미술관과 소장품」, 『SeMA Agenda 2020 ‘수집’: 소유에서 공유로. 유물에서 비트로』 (서울시립미술관, 2020), 20.  

  12. 이러한 치명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최근 2~3년 사이에 수집 공모제를 중심으로 하되 학예사 추천 제도를 병행하는 등의 변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13. 정종효, 「공립미술관의 작품구입 제도에 관한 연구—지역 대표 미술관을 중심으로」, 『미술문화연구』 14 (동서미술문화학회, 2019), 108. 

  14. 2008~2009년에 지역 미술을 매체별로 조망한 《대전미술 하나, 둘》 기획과 2011~2013년에 주요 미술 플랫폼을 역사적 자료를 통해 조망한 《대전미술아카이브》 기획, 그리고 2019~2020년의 주요 시기별 《대전미술 다시쓰기》 기획까지.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송미경의 글 「1945–1970년대 대전미술: 도시형성의 특수성과 미술활동을 중심으로」, 『다시, 바로, 함께, 한국미술–지역미술 다시보기: 대전』 (예술경영지원센터, 대전시립미술관, 2019), 1, 각주 4.  

  15. 허나영, 「1980–1990년대 대전미술: 변화의 시기 속 고요한 다양화」, 『다시, 바로, 함께, 한국미술–지역미술 다시보기: 대전』 (예술경영지원센터, 대전시립미술관, 2019), 7.  

  16. 박훈하, 「1980년대 부산미술과 로컬리티」, 『2020 부산시립미술관 학술논문집, 1960–80년대 부산미술』 (부산시립미술관, 2020), 40, 각주 4.  

  17. 이는 도린 매시가 “항상 변하는 사회·권력관계의 기하학을 생각하는 방식”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소장품에 관한 미술관의 정체성을 담론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매시의 방법론을 주요하게 참고했다. 도린 매시, 『공간, 장소, 젠더』, 정현주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5), 43. 

  18. “미술관의 여러 활동 가운데 ‘소장품(collection)’의 근본적인 의미를 재고하고, 동시대 서양미술의 흐름 중 미술사적 주요 사건을 주목, 조망하여 수집된 서양미술 소장품의 성격을 맥락화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자 한다.” 대전시립미술관 웹사이트 《이것에 대하여》(2020) 전시 소개 웹페이지 참조.  

  19. 서울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포항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참여. 

  20. 최은주, 「인사말」, 『달이 떴다고, 광주·대구 달빛동맹 교류전』 (광주시립미술관, 2020), 7. 이 전시의 도록은 두 권으로 출간됐다. 2020년 2월 대구미술관에서 먼저 제작한 『달이 떴다고, 대구·광주 달빛동맹 교류전』과 2020년 7월 광주시립미술관이 펴낸 『달이 떴다고, 광주·대구 달빛동맹 교류전』. 이 중 전자에 실린 대구 측 비평문을 포함해서 광주 측 비평문이 함께 실린 후자를 최종본으로 간주하고 인용 시에는 광주 버전을 기준으로 삼았다.  

  21. 경기도미술관 웹사이트 소장품 관련 메뉴의 태그 클라우드 탭.  

  22. 김장언, 「동시대성의 빠른 포섭, 소장품과 20, 30대 작가들」, 『컬렉션_오픈 해킹 채굴 웹사이트』 (서울시립미술관, 2021). [같은 글 ‘세마코랄’ 안에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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