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을 따라가기, 끌려가지 않으면서

김지혜
김지혜는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 분야는 자연과 사회의 관계, 공동체의 경계와 커머닝, 비인간의 행위성과 생태 정치이다. 해양쓰레기를 매개로 생산되는 인간과 비인간들의 혼종적인 연결망을 추적하여 박사논문 「해양쓰레기와 함께 세계 짓기: 지구적 해양보전에서 나타나는 존재들의 연합과 분열」(2022)을 작성하였다. 그 외에도 “해양쓰레기 탐사기”라는 제목으로 문학잡지 『Littor』(2022)에 연재하였고,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2022)을 공역하였다.

―어떤 쓰레기와 창작 재료 사이의 문제들

연구…만들기…미술

‘우리바다’는 한국에 있는 해양보전 비정부기구로서 해양쓰레기 문제 해결을 목표로 십여 년 간 활동해온 조직이다.1

내가 우리바다의 사무실에 처음 방문했을 때, 사무실 곳곳에는 ‘해양쓰레기’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해양쓰레기는 한 아름 정도 되는 크기의 주황색과 흰색 부표였다.2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이 부표들은 해변가에 가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우리바다의 사람들이 해변가에 있던 이들을 주워 사무실로 데려 온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부표가 무수한 해양쓰레기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바다가 하필 이 사물을 선택하여 가지고 온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페트병이 아니라 바로 이 부표가 해양쓰레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방문 이후에 나는 약 10개월 동안 우리바다와 함께 일하면서 이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연구를 하게 되었고, ‘인간과 해양쓰레기가 함께 만들어가는 세계’라는 다소 모호하고도 추상적인 주제로 논문을 쓰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그들이 해양쓰레기를 줍고, 기록하고, 자료화하고, 사람들을 만나 협상하고 교육하며, 정책에 개입하는 여러 실천과 논리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의 ‘참여관찰’ 기록에 적힌 사건들은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하여 발생하였고 아주 많은 부분들은 시간의 저편으로 흘러갔다. 결국에는 옹졸하게 남은 몇 가지 편집된 사건들이 선택되어 이 세계의 특수성을 설명해주는 증거가 되었다.

연구자로 훈련받아온 내가 만약 미술에 대해 이야기할 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연구가 미술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만들기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이 공통점은 서로에게 영감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연구자는 자신이 구현한 특수한 구성물—보통 논문이라고 불리는—의 참조점들을 구성물 안에 삽입함으로써 특정한 계보 속에 연구를 집어넣고, 연구가 개별적 시선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 같다. 참조점들은 보통 ‘데이터’라고 불리기도 하고, ‘참고 문헌’이라 불리기도 한다. 여하간 연구는 이러한 참조점들을 통해 다소 안정된 형식 속에 스스로를 안착시킴으로써 만들기 과정을 잊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몇몇의 연구자들은 연구가 만들기라는 점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는데, 한 예로 실용주의자 로티는 연구가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그에게 상상력이란 “새롭고, 낯설며, 역설적이고, ‘비합리적인’ 것들을 나타내는 낱말들과 이미지들을 꿈꾸는 것”3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상상만으로 만들기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만들기는 반드시 재료가 있어야 한다.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만들기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있음에서 다른 있음으로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인간 ‘창작자’ 역시 특수한 종류의 재료로 간주한다는 점을 덧붙이고자 한다. 인간 창작자는 매우 특수한 능력을 지녔지만, 만들기의 참여자라는 점에서 다른 재료들과 형식적으로 동등하다. 인간과 나무와 조각칼은 각각 아주 다른 특수성을 지닌 재료들이다. 그들은 서로가 없을 때는 하지 못했던 것을 함께 있을 때는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인간과 나무와 조각칼을 믹서기에 간다고 해서 목각 새가 나오지는 않는다. 목각 새는 각자의 특수성이 발휘된 결과이지, 마구잡이로 혼합된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만들기는 결코 합쳐지지 않는 것들이 제한적으로 결합된, 희박한 가능성의 소산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연구와 미술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글은 연구와 미술이 얼마나 닮았는가 혹은 우리가 서로 얼마만큼 비슷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관심은 그 반대이다. 연구에서의 재료와 미술에서의 재료 사이에서, 사물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 이것이 나의 질문이고, 이 글을 시작점으로 삼고자 한다.

문제적인 연구-재료

해양쓰레기와 얽혀있는 삶을 연구해보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곧바로 문제점이 따라왔다. 첫 번째는 이 사물이 너무 명백하게 ‘나빠’ 보였다는 점이다. 나 역시 해양쓰레기가 지닌 힘에 끌려 연구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연구를 시작하려고 보니 사물의 명백성은 문제가 되었다. 해양쓰레기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것을 떠올렸다. 그들은 해양쓰레기가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고, 더 나아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나에게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곧잘 손에 쥐고 있는 일회용 컵을 미안해했다. 사람들은 이미 그것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들은 이미 그 ‘사실’을 바탕으로 도덕적 실천의 방식을 고민했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뿐만 아니라, 정부 정책, UN산하 기구, 국제 환경단체, 기업에서도 해양쓰레기가 등장했다. 그들은 이 사물이 어느 바다에서나 볼 수 있으며, 심지어 엄청나게 많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또한 그들은 이 사물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며, 이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개인별, 도시별, 산업별, 국가별, 초국적이고 지구적인 차원에서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도 말했다. 해양쓰레기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은 대단했다. 그리고 그 중력은 ‘이 사물을 바다에서 제거하라’는 특수한 종류의 도덕감을 불러일으켰다. 다수의 연구가 그러한 도덕감을 따르면서, 해양쓰레기는 점점 더 무게감 있는 사물이 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강력함은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너무 명백하기 때문에, 해양쓰레기는 쉽고도 진부한 교육 소재가 되어버린다.

나는 다른 방식의 연구가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꼈다. 그것이 내가 따르고자 한 연구 방식인데, 아주 명백하게 보이는 사물의 불투명도를 낮추어 더 이상 명백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이러한 작업은 사물 뒤에 있어 거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의 실루엣을 드러나게 만든다. 운이 좋으면, 그것들의 구체적인 형상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사물을 따라가면서도 사물의 현시( 現示) 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 나는 의도적으로 그의 강도를 조절하였고, 의도적으로 ‘ 나쁜 사물’ 이라는 명제를 피하였다. 그럼으로써 존재의 구성에 대해 살펴보려고 했다. 실재를 밖에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며 단지 그 실재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을 연구의 목표로 삼지 않고, 실재 그 자체를 이 연구의 문제로 다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나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루는 만들기’라는 이중의 만들기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나는 존재를 조작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피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는 자기모순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존재의 분할과 고유성이 선험적이지 않고 만들어진다면, 어떻게 이 연구는 ‘이것’이 해양쓰레기이고, ‘저것’이 해양쓰레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연구는 어떻게 그것을 ‘사전에’ 규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풀기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단순히 ‘그 무엇도 규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해양쓰레기, 인간, 국가, 과학 등 구별되는 것들을 모두 뭉개고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혹은 사물은 무한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존재 방식도 허용된다 여김으로써, 특정한 한 방식의 존재 형태를 내세우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차이를 무화시켜 세계를 붕괴시키는 첫 번째 접근이나, 제약 없는 무한한 세계라는 두 번째 접근법 모두 우리의 삶에 대한 적절한 접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말했듯이 우리의 움직임은 그 어디에도 없는 장소에서 한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4 과학기술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표현을 나의 방식으로 변형하자면, 그러한 연구는 날아다니는 천상의 연구들이지 지상의 연구들은 아니다. 내가 있는 세계는 조금 지루하지만, 어느 정도 단단해서 모든 것들이 손바닥 뒤집듯 송두리째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들은 진동하며, 어느 순간에 존재는 다른 존재로 튀어 오른다.

한 장소에서 출발해서, 함께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의 방법들을 거부하면, 연구는 좀 더 소박해진다. 결국 연구는 몇 가지 가능한 시작 지점—재료—중 하나를 선택하고, 길을 더듬으며 가보는 수밖에 없다. 나의 시작 지점은 이 글의 처음에 나온 우리바다라는 조직이었던 것이다. 물론 따지고 보자면 더 뒤로 갈 수 있겠지만. 그리고 나는 우리바다의 사람들과 함께, 섬과 해안과 다른 나라와 연구소, 회의장소 등을 함께 다니며, 새로운 해양쓰레기들을 만나게 되었다.

연구의 재료로서 해양쓰레기는 결코 해양쓰레기 그 자체는 아니다. 연구물은 모든 것을 보는 절대자가 관찰한 결과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 속에, 특정한 역사 속에, 특정한 관계 속에 존재들이 마주치고 서로를 변형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제한된 몸과 몸들이 교차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존재의 모습은 부분적이다. 그 부분적인 것들의 변화를 해양쓰레기-연구 속에 포함시키면 연구의 시작 지점과 끝 지점의 해양쓰레기는 달라진다.

해양쓰레기를 따라 이동하는 순간순간에 그는 갑자기 너무 복잡한 사물로 변해버린다. 아주 손쉽게 포착 가능할 것 같은 사물조차도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돕는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해양쓰레기라는 사물은 ‘명백’하거나 ‘사소’한 사물이 아니었다. 해양쓰레기에 다가가면 다가간다 생각할수록 정보의 양은 줄어드는 게 아니라 늘어났고,5 그때 해양쓰레기는 너무 많은 사물들을 포함한다. 그것의 부분들은 크기도, 재질도, 형태도, 색도 모두 다르며, 사실상 해양쓰레기는 몸을 지닌 거의 모든 존재들을 포함할 가능성을 지녔다. 특정한 시기 특정한 장소에서는 사과 껍질이나 나뭇가지, 조개껍질도 해양쓰레기 범주에 들어가곤 했다. 해양쓰레기가 복잡해질수록 연구자는 길을 잃어버렸다. 시작할 때만 해도, 길은 너무나 크고 명확해서 시시해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대로(大路)는 제각기 난 작은 길들이 엉켜있던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연구자는 결국 연구의 동반자들을 기준점 삼을 수밖에 없었고, 그들을 따라 이동하며 움직여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마주친 해양쓰레기는 구체적 사물, 숫자, 이미지, 조형물, 동물의 죽음, 섬, 안개, 영웅들의 적, 시공간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되었다가, 마침내 작은 것들로 쪼개지기까지 했다. 이들은 각자의 이야기 속으로 나를 끌어당겼고, 그중 몇 가지는 따라갔지만, 몇 가지는 포기했다. 그리고 연구자에게 나타난 그 무엇도 해양쓰레기라는 무시무시한 존재를 그대로 보여주지도 않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들을 해양쓰레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만들기와 모순

실컷 연구 이야기를 해놓고 나서, 이것을 다시 ‘만들기’라는 보다 일반적인 행위의 이야기로 포장하는 것은 아주 조악한 매듭짓기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 연구는 만들기의 한 사례에 불과했다. 해양쓰레기의 주원료라고 알려진 플라스틱은 창작의 재료로서 너무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실현시켜주었다. 그것은 거주 공간과 이동 수단, 삶의 온갖 유용한 것들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해양쓰레기가 되어버리자, 사람들은 갑자기 진지해졌고, 정직한 실재론자가 되었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해양쓰레기’가 ‘플라스틱’이 보여주지 못한 세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해양쓰레기는 일단 한 번 버려졌던 것을 기억하기에, 자신의 역사를 잊지 않는다. 사물은 사고를 강제한다.6 우리가 만약 어떤 플라스틱이 아니라 어떤 쓰레기를 창작의 재료로 사용하길 시도했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 존재가 짊어지고 있는 사물의 역사와 정치를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와 함께 살아가면서 짊어져야 할 일종의 제약이다. 하지만 해양쓰레기라는 사고의 재료가 보여주는 세계가 단지 규범만으로 가득 찬 세계는 아니다. 내가 만나본 해양쓰레기는 때때로 즐거움의 원천이 되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재밌는 사물이었다. 물론 슬픔과 비극도 곁에 있었다. 이 지점에서 해양쓰레기가 보여주는 세계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절망이라기보다는 희망을 암시한다. 모순이야말로 우리 세계의 변화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들기는 이것이 아니었다가 이것이 되는 그 모순을 행하는 작업이다.

*이 글은 서울시립미술관의 기관의제와 전시의제의 소주제를 발굴하는 2022 SeMA 의제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수록되었습니다. 2022년 서울시립미술관의 기관의제는 ‘제작’입니다.


  1. 이 조직명은 익명이다. 

  2. 이 부표들은 엄밀히 말하면 표식 용도가 아니라 부력을 이용해 사물들이 떠다닐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기 때문에 부자(浮子)라고 불린다.  

  3. 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김동식, 이유선 옮김, (서울: 민음사, 1996), 13. 

  4. Tim Ingold, Lines: a brief history (London; New York: Routledge, 2007). 

  5. Marilyn Strathern, Partial Connections (Walnut Creek: Altamira Press, 1991; 2004). 메릴린 스트래선, 『부분적인 연결들: 문명 너머의 사고를 찾아서』, 차은정 옮김(파주: 오월의 봄, 2019). 

  6. Isabelle Stengers, Cosmopolitics (Vol. 1), trans. Robert Bononno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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