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은 작가 인터뷰: 손끝으로 경험하는 세계, 방향을 더듬으며 그리는 회로

엄지은
엄지은은 신체를 매개로 비디오와 퍼포먼스, 그리고 리서치 작업을 통해 감각으로서의 서사를 탐구한다.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세계의 리듬과 공명하는 순간에 주목하며, 현 시대의 개인의 감각이 어떻게 공동의 감각이 될 수 있을지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최근 방향성 없는 세계에 휘말리고 있음을 느끼며 지금의 방향감각은 무엇인지 찾아 헤매고 있다.

세마 코랄의 커미션 연구로, 시각예술작가 엄지은은 신체와 땅이 연결된 회로를 그리는 웹프로젝트 〈피치카토 서킷〉(2023)을 선보입니다. 〈피치카토 서킷〉은 관객이 스크린을 터치함으로써 작업을 진행시키는 인터렉티브 웹 작품입니다. 신체의 움직임이 더 거대한 세계와 연결되는 감각에 대한 작가의 관심사가 이번 작품에서 어떻게 확장되었는지, 웹이라는 매체를 사용하면서 어떤 새로운 지점들을 만들어 냈는지 이야기 나눕니다.
〈피치카토 서킷〉 작업 소개 페이지 ↗

세마 코랄: 〈피치카토 서킷〉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방향 감각’은 작가님의 이전 작업에서부터 이어져 오는 관심사인 것 같습니다. ‘방향 감각’을 주제로 어떤 작업을 해 오셨는지, 그 과정에서 영상, 카메라와 몸의 움직임의 관계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엄지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입주 중에 참여했던 발표회 〈2023 난지액세스: 랠리〉 에서 방향 감각에 대해 생각해 왔던 것을 짧게 발표하기도 했었는데요, 사실 ‘방향’ 자체에 대한 관심이 계속 되었던 것 같아요. 어릴 적 태풍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매년 태풍이 지나갈 방향과 경로를 매시각각 살피기도 했어요. 미래를 알 수 없음에 대한 두려움이 컸어요. 나름 교회를 열심히 나가던 학생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공교롭게도 태풍이 창문을 다 깨부수고 난 시기부터 교회를 안 가기 시작했네요. 가족들이 한국 사회에서 막연한 두려움을 특정 지표에 투사하고 그것을 믿으며 또 의지하며 살아가는 본성에 대해 늘 궁금했고, 그러다 보니 믿음과 행동 방식의 인과구조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궁금증이 생기게 됐어요. 필연적 죽음이 있기에 삶의 동기, 즉 방향성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어 왔던 거죠.

엄지은, 〈해일의 노래〉, 2021, 4K, 싱글채널비디오, 18분 37초.
엄지은, 〈모닥불〉, 2023, 싱글채널비디오, 18분 50초.

이런 관심사를 바탕으로 〈잠수병〉(2017)〈해일의 노래〉(2021) , 〈모닥불〉(2023) 과 같이 직접적으로 개인사의 복잡한 방향성을 다루기도 했고요. 재개발 지역에 사람이 다 빠져나가고 난 빈 집들에 카메라를 집어넣어 촬영했던 〈샷다와 셔터〉(2016) 부터 탄핵 시위로 서울 중심부의 길이 막혀 돌고 돌아 아르바이트에 도착하는 〈파트 타임 로드〉(2017), 10년 10개월을 도망다녔던 80년대 고문 기술자이자 목사였던 인물의 이야기를 추적하는 〈비와 빛〉(2019), 팬데믹이 시작되던 시기에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설산을 행진했던 〈워킹 메들리〉(2021) 등, 어떤 사건들을 중심으로 그 경계를 맴돌고 여러 시간대를 배회하면서 사건의 위상을 탐색하는 작업을 만들어 왔다고 생각해요. 작업을 시작하던 초기에 기록에 대한 태도를 많이 고민했었고, 그에 대한 방법론으로 늘 제 몸과 신체적 경험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지리적으로 마을 단위와 한반도의 방위에 따라 날씨, 행동 양식, 언어에 대한 리서치를 하기도 했고, 동물의 체내 자기감각(magnetic sense)1 에 대해 리서치하기도 했어요. 인간도 18시간 이상 금식을 하다가 초콜릿을 먹으면 북쪽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는 연구도 있더라고요.2 어떤 다큐에서 본 “정도의 차이이지 종류가 다르지 않다.”는 말이 인상 깊었어요. 국내 여러 곳에 답사를 다녀오며 느슨하게 리서치를 하던 중 신촌극장에서 작업할 기회가 생겼고, 〈배꼽점〉(2023) 을 만들게 됐어요.

엄지은, 〈배꼽점〉, 2023, 퍼포먼스, 60분.

〈배꼽점〉에서는 방향 감각을 상징적/물리적 방향 감각으로 분류해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교차하는 구조를 만들었어요. ‘배꼽점’이라는 이름 자체도 강원도 양구의 한반도 정중앙점을 뜻하는 명칭에서 따오기도 했고요. 극장에 온 관객 각자의 배꼽에서 시작해서 마을의 당산나무, 중력과 풍선 오뚜기, 회전하는 테이블과 바람부는 날에 공을 주고받는 사람들, 원형 데크를 달리는 사람과 드론의 움직임, 아기를 숨기기 위한 고대 병사들의 칼춤 ‘피루스 댄스(phyrric dance)’ 등 층위가 다른 이야기들이 회전 테이블이라는 하나의 점을 중심으로 마구 펼쳐집니다. 멀미가 날 만큼요. 영상이라는 시각 정보가 직접적으로 신체에 영향을 주고받는 것에 대한 관심은 〈워킹 메들리〉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고, 〈배꼽점〉에서 더 극대화된 것 같아요.

세마 코랄: 방향 감각이라는 게 인간 각자의 움직임과 관련된 개인적인 감각일 뿐만 아니라 지구적으로 연결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계시다는 점이 인상적이에요. 인간이 본능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북쪽을 찾을 수 있다는 연구도 무척 흥미롭네요. 이러한 관심이 이번 작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것 같고요. 영상부터 설치까지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시지만, 웹 기반 작업은 처음이셨을 것 같은데, 어떤 과정으로 진행하셨는지, 어려운 점은 없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또 회로 디자인에 있어서도 처음과는 방향이 달라진 것 같은데, 어떤 고민들이 있으셨나요?

엄지은: 웹을 공간으로 작업을 한다고 했을 때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손이었어요. 살면서 많은 시간을 크든 작든 모니터 앞에서 보내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코드를 꼽듯 손가락이 웹과의 물리적 연결을 만들어 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손가락은 디지털 기기와의 연결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연결 매체이지만, 동시에 신체를 무감각하게 하기도 해요. 정신은 이미 웹과 연동되어 있고, 몸은 아무리 어깨가 결리고 손목에 터널증후군이 오고 목과 허리가 거북이처럼 굽어도 디지털 기기에 맞게 계속 맞추는 게 우선이 되었으니까요. 바른 자세를 원한다면 결국 또 다른 사물에 의지해야 하고요. 결국 저에겐 웹도 물리적 사물의 영역으로 느껴지는 점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4월 말에 세마 코랄의 제안을 받고 7월 즈음에 릴레이에 협업을 요청했어요. 여러 아이디어들과 리서치들을 해보던 중 웹을 언어로 쓰는 사람과의 협업을 하는 게 중요할 것 같았어요. 그리고 나서 생각보다 작업 제작 기간이 길어지게 되었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제가 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몇 가지 제안, 몇 가지 버전을 보고 나서 그게 어떤 것이 될지 한참을 고민했어요. 보고 나서도 이게 뭔지 모르겠었거든요.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도 시간을 끌다가 결국엔 잊어버릴 때 즈음 다시 보고 다시 경험하고 그러고 나서야 선택을 하고 피드백을 보내고… 결국 곱씹고 곱씹다가 이 인터뷰를 통해서 다시 언어화를 하고 정리할 수 있게 되어 좋습니다. 하반기 내내 작업을 했는데 같이 시간을 보낸 릴레이에게 무척 감사합니다.

회로는 처음에는 어떤 형태여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어떤 크기의 원형이든, 사각형이든 아주 큰 축척을 이용해서 제한된 시야를 경험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전체 형태는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회로에 대한 드로잉을 하던 중, 결국에는 이 회로 또한 현실의 어느 한 지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주 큰 이동을 굉장히 천천히 제한적으로 해야 하고, 비슷한 경로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이동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그러다 철새의 움직임이 떠올랐어요. 국토지리정보 사이트에서 철새들의 움직임을 다 따라가 보다가 가장 이동이 크고 최소 두 번의 사계절이 기록된 아이를 찾았어요. 수신기br1688과 연결된 큰기러기예요. 2017년 1월부터 2019년 3월까지 관찰되었더라고요.

이 친구의 이동을 따라 약 350개 정도의 좌표를 땄고, 이 움직임을 따라 애니메이션처럼 드로잉을 100장 정도 해서 릴레이에 보냈어요. 기러기의 이동과 좌표 이야기를 했을 때, 릴레이는 세 가지 방식이 가능할 것 같다고 제안했어요. 제가 보낸 것처럼 타일링된 이미지를 갈아끼우는 방식, 또는 몰핀 쉐입(morphing shape)3으로 길의 모양이 바뀌는 것, 또 맵박스(mapbox)4 를 이용해 지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식. 두 번째 방법인 몰핀 쉐입이 재밌었던 것은 앵커포인트를 이용해서 모양이 바뀌고 덩어리감이 더 느껴진다는 거였어요. 처음에 회로와 미로에 대한 리서치를 진행 했을 때, 미로는 결국 두 개의 덩어리라서 한 손으로 하나의 벽을 짚고 미로를 통과하면 결국 끝에 도달한다(좌수법, 우수법)는 얘기가 재밌었거든요. 결국에 이 방법은 색 표현을 다양하게 하기 어렵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무거워서 제외하게 되었어요. 이 방법의 장점은 변화하는 방법이 재밌는건데, 선, 그러니까 경로 이미지의 연속은 생각보다 큰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았어요. 결과적으로 맵박스를 이용하게 된 건 좌표를 관리하는 방법도 용이했고 화면이 그렇게 무겁지 않았거든요. 이번 작업에서 너무 무거워지는 것도 너무 과한 변화가 있는 것도 지양하려고 했기 때문이에요. 또 리서치를 하면서 내비게이션도 미로의 최단 거리를 찾는 원리로 작동된다는 걸 알았는데, 맵박스를 쓰면 이런 내용들을 뒤틀어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세마 코랄: 작품에서 만들어지는 궤적이 어쩌면 회로일 수도 있고 미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전에 작가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미로 공간의 마침표를 잡고 있어야 한다’고 했던 것도 기억이 나고요. 이번 작업에서 또 중요하게 등장하는 요소가 ‘피치카토’ 같아요. 피치카토라는 연주 방법은 손으로 튕긴다는 행위 자체가 음에서도 떠오르게 하는 굉장히 신체적인 주법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마 그런 점 때문에 작품의 중심 개념으로 가져오셨을 것 같고요. 피치카토를 디지털의 터치로 옮겨오면서 고민했던 지점이 있다면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엄지은: 피치카토는 현악기의 현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주법인데요. 손가락의 움직임을 통해 파장을 만드는데, 소리의 최고점(어택, Attack)이 가장 처음 파장을 만든다고 해요. 어택 타임이 빨라서 소리가 갑자기 줄어들어 통통 튀는 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엄지은, 〈피치카토 서킷〉, 2023, 인터랙티브 웹, 40분.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세마 코랄) 제작의뢰 작품.

〈피치카토 서킷〉은 이 어택을 터치로 치환하는 거예요. 손가락을 통해 다음 움직임이 진행되죠. 물론 선이 연결된 회로이기 때문에 음과 같이 사라지진 않고 이상하게 늘어지게 되는데요. 이 부분에서 내가 주체적으로 앞으로 가는 느낌과, 준비되지 않았는데도 몸이 밀려가거나 끌려가는 느낌이 번갈아 들기도 해요. 분명 나의 움직임으로 회로가 작동하지만 길은 하나라서 수동성을 내포하게 되기도 하는 거죠. 용어의 어감에서 주는 경쾌함과 실제 서킷의 꼭 경쾌하지만은 않음이 모순적으로 뒤엉켜 있는 중간적 상태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 사실 가끔 터치가 잘 안 돼요. 저는 다른 사람이든 사물이든 평소에 정전기가 굉장히 잘 통하는 편이라 자주 깜짝깜짝 놀라는데, 그럼에도 손이 건조해서 그런 건지 터치스크린이 작동하지 않을 때가 굉장히 잦아요. 이런 부분에서 단순한 터치로 작동된다 하더라도 각자의 손가락의 컨디션과 움직임의 습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선의 색은 열감지 센서에서 참고하기로 했고 릴레이와의 대화를 통해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색이 나온 것 같아요.

엄지은, 〈피치카토 서킷〉, 2023, 인터랙티브 웹, 40분. 서울시립미술관 모두의 연구실 ‘코랄’(세마 코랄) 제작의뢰 작품.

세마 코랄: 터치로 만들어지는 회로가 어떤 모양을 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엔딩’에 도달했을 때 오는 감동이 무척 남달랐던 것 같아요. 내가 손끝에서 만들어 낸 궤적이 큰기러기의 이동경로라는 것을 알았을 때 정말 놀랍고 감동적이었어요. 내 손끝의 감각이 마침내 지구적 여정에 이르는 것을 보면서 나와 타자, 지구가 하나로 연결되는 어떤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또 철새라는 비인간 존재의 이동 경로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다른 생태 작업에서 시도함에도 불구하고 흔히 경험하지 못하는 비인간 존재와의 연결의 감각도 느꼈고요. 그러한 연결의 감각이 무척 중요하게 느껴지는데, 어떤 관심사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엄지은: ‘엔딩’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재밌어요. 얼마 전 시나리오 쓰는 친구가 ‘엔딩이 있어야 글을 시작할 수 있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요. 마지막에 큰기러기가 추락하면서 선이 계속해서 크게 하강해요. 결국 줌아웃이 되며 그동안 이동해 온 전체 경로가 보이고 ‘안녕!’ 인사를 건네는데, 그 이전에 열심히 움직였던 손끝의 터치들이 다시 환기되면서 손과 발의 저릿한 감각이 느껴질 거라 생각했어요. 결국은 새의 몸에 매단 위치 추적기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인데, 사실 사진을 보면 굉장히 족쇄 같거든요. 물론 이런 정보들은 인플루엔자를 예방하거나 하는 용도로도 사용되겠지만, 저는 뜬금없게도 카메라와 인간의 관계가 연상되기도 했어요. 사물과 생명체의 공생의 차원에서요.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번 작업을 하면서 주요했던 키워드가 ‘손끝부터 땅까지 연결된 회로’였는데요.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것은 어떤 종류의 연결일까? 어떤 질감일까? 스스로 계속해서 되물었어요. 결국 어떤 끈적임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국립생물자원관의 철새지리정보도 굉장히 매끈하게 잘 정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중국, 몽골, 러시아의 영토와 엮여 있기에 국제공동연구 협약을 맺는 등 여러 네트워크들이 달라붙어 있어요. 돌고 도는 계절의 변화와 질기고 끈적한 중력 속에서 찌릿하는 정전기를 만들며 접촉하고 부대끼는 감각을 되새기고 싶었어요. 정신이 스크린 속에 있다가도 안경닦이로 힘주어 모니터에 묻은 지문을 닦는, 포커스를 계속해서 옮겨야만 하는 물리적인 감각들이요.

세마 코랄: ‘엔딩’에 도달하려면 약간의 인내가 필요한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었어요. 〈피치카토 서킷〉은 웹을 기반으로 하는 인터랙티브 작업이지만, 그보다 영상 작업을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내가 타임라인을 조정할 수 없이 작업의 시간과 속도에 맞춰서 감상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미술관에서 영상 작업을 볼 때의 감각을 핸드폰으로 옮겨 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점에서 웹을 ‘시간’ 기반 매체로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고요. 또한 이 과정에서 관객이 느끼는 기대감, 지루함 등의 신체적 반응도 염두에 두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객이 어떤 호흡으로 작품을 보기를 바랐는지 궁금합니다.

엄지은: 처음에 작업을 구상했을 때 이쪽 저쪽이 열린 웹의 개방적 특징보다는 반복적 루틴을 가진 폐쇄회로 같은 특성에 더 관심이 갔어요. 선택지는 딱 두 개이고 계속해서 이 여정을 함께 하거나 창을 닫고 나가는 거죠. 중간에 나가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잔인함(?)이 있는데 전시장과 다른 듯 비슷한 것 같네요. 온라인 스트리밍처럼 스킵(skip, 건너뛰기)이 불가능하다는 점, 게임처럼 미니맵도 없어서 어디쯤 왔는지도 모른다는 점, 디렉토리 구조도 아니라서 이전 단계로 갈 수 없다는 점. 내 손이 나도 모르게 두 번 클릭하면 당황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결국은 순간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왜 철새의 이동경로인 것을 마지막에 알게 되어야 하는지, 왜 시야가 제한되어야 하는지를 고집했을까 생각해 보면 ‘끝까지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어떤 것’과 관련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가장 손쉬운 핸드폰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영화관의 감각과 비슷한 걸 원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최근에 경험의 결핍에 대한 생각을 자주 했어요. 저는 사실 OTT를 자주 이용하지는 않는 편인데 그 이유는 제가 굉장히 게으르기 때문이에요. 시리즈를 다 볼 엄두도 안나고 한 화에 1시간에 가까운 분량을 규칙적으로 매주 본다는 건 제 기준에 엄청 부지런한 거 거든요. 이상하게 1화를 보고 나서 엄청나게 재밌지 않으면 2화를 클릭하기가 힘들어요. 자유로운 선택지는 결국 계속 무엇을 볼지 섬네일과 트레일러만 보면서 1시간을 보내는 경험을 낳게 되는 듯해요. 인스타그램도 어느덧 전시 게시판이 되다 보니까 “아 결국 사진으로 밖에 못 봤네”라고 말하는 일이 많아졌고요. 유튜브 알고리즘도 더 이상 새로운 것을 검색하지 않아서 결국 같은 주제의 콘텐츠만 반복적으로 소비하게 되기도 하고, 챗GPT랑도 얘기하다 보면 어느 순간 얘기가 돌고 돌더라고요. 단편적 이미지들, 직관적으로 빠르게 캐치되는 것, 평면의 세계, 쇼츠, 부스러기를 싹 치우고 편집하는, 판단을 유보하면 경제적 손실을 일으키는, 또 늘 다음이 존재하기에 ‘지금’이 버려지는 세계… 결국 제가 최근 느끼고 있는 어떤 종류의 결핍이 이 작업을 떠올리게 한 것 같아요. 40분 이상의 시간을 기꺼이 소요해야 마지막에 도달하는, 길게 늘려 놓은 이 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즐기며 경험해 주시길 바랍니다.


  1. [편집자 주] 동물이 지닌 감각 중 하나로, 지구 자기장(geomagnetic field, GMF)을 느끼는 감각. 

  2. 경북대학교 생명과학과 채권석 교수의 인간 자기감각 실험을 참고.
    채권석, 「인간도 지구자기장을 느낀다」, 『동아사이언스』 , 2019년 2월 24일. 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27013; https://www.youtube.com/watch?v=IRpNcIM-ABE

  3. [편집자 주] 상호작용에 의해 기존 형태가 전혀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 

  4. [편집자 주] 맵박스(Mapbox)는 다양한 용도를 위해 맞춤형 온라인 지도를 직접 만들거나 제공해주는 업체이다. 좀 더 다양한 활용 예시들은 mapbox.com/maps 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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