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소장선을(이) 형성하는 비평적 역사관: 미술사의 헤게모니를 직조 및 추동하는 소장선을 구축하고 업데이트하기

임근준
임근준은 미술·디자인 이론가이자 역사연구자로,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동성애자 인권 운동가이자 현대미술가로 활동하며 한국 사회의 작은 변화를 이끌기도 했다. 『공예와 문화』, 『아트인컬처』, 한국미술연구소, 시공아트 편집장을 역임한 이력이 있으며, 대표 저서로 『예술가처럼 자아를 확장하는 법』(2011), 『이것이 현대적 미술』(2009),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2006) 등이 있다. 2008년 이후 당대미술이 붕괴-해체되는 과정에서, 마땅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통사로서의 현대 한국/아시아 미술사를 작성하는 일’을 인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

한국의 현대미술관은 국가주의, 지역주의 소장선을 바탕으로 구미 현대미술의 가치 평가 시스템을 초극할 수 있는가?

미술(가)의 자율성, 미술관의 자율성, 소장선의 자율성

‘순수예술’에서 ‘순수’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예술의 자율성(autonomy)을 탐구 주제로 삼는다는 것을 뜻했다. 예술의 자율성을 예술의 주제로 삼는 순수예술의 노선은, 이미 19세기 후반에 형성돼 있었다. 하지만 그 자율성이 미술에서 어떤 방법과 과정으로 구현돼야 하는가를 따질 때, 문제는 더 심화해야 했다. 진리를 감지하는 선험적 이성을 미적 경험에 우선하는 것으로 사고하던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이래의 경향에 따라 미적 자율성을 추구하고, 그에 부합하는 창작 메소드를 구현하고자 하는 강박적 흐름(자기 참조적 형식주의로 귀결되는)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와 그 이후의 세대에서 본격화했다.

우리가, 모더니즘의 현대미술이 추구했던 자율성이 상당 부분 허상이고 과장된 신화에 불과했다는 신미술사학 이래의 비판을 공유한다고 해도, 자율성의 추구가 현대미술의 역사적 전개를 이끌었다는 사실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두 사실은 상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후기 구조주의 담론에 기대 모더니즘의 자율성 신화를 부정하고 해체했던 세대는, 자신의 활동 영역에서 자율성을 부정하고 본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여러 힘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를 명시적으로 드러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더니스트 예술의 자율성은 부정했지만, 예술가의 자율성이라는 신화가 제공하는 특유의 자유와 발언 권한만은, 양보 없이 누렸다. 예술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작업을 전개하는 경우에도, 예컨대 제도 비평의 장소 특정적 작업을 시도할 때도,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지니는 자율적 권역을 재창출하는 데 신경을 썼다. 개념미술 이래 많은 작가들은 작업 스테이트먼트와 법적 효력을 지니는 비공개 도큐먼트(주로 작업 설치에 관한 지시 사항을 정리한)를 통해,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난 상태에서도 자율성의 특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애를 썼다.

네오 아방가르드 세대의 작가들은, 겉으로 하는 말이 어떻든 간에, 대다수는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식 미메시스의 전략, 즉 ‘자아의 타자에의 동화’를 긍정하는 노선을 걸었다. 그림들 세대가 전유를 통해 실재성을 재맥락화하고 타자성의 영역에서 전복성을 포집한다고 해도, 그들이 설치 미술이든 다매체 미술이든, 자본주의 세상의 질서에 대응하는 미메시스의 비평적 조형 질서를 창출할 때면, 타자(사물과 물질을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타자)에 자아를 동화시키는 전후 비판 이론 특유의 인식론, 즉 아도르노가 성찰적 모더니즘의 옹호를 위해 기획해 낸 ‘비희생적 비동일성을 통해 타자성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주체’ 같은 것을 대전제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미메시스의 전략을 통한 자율성의 재구성’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그것이 작가 주체에 끼치는 영향과 작업에 끼치는 영향이 통합적으로 고찰될 기회는 사실상 전무했다는 점에 있었다. 따라서, 작가와 작업을 둘러싼 제도적 조건들, 종종 작가에 의해 작업의 필수불가결한 형식이자 외골격으로 호명 및 활용됐던 그 ‘특정된 조건들’(달리 말해 ‘특정성의 논리를 부여받은 조건들’)은 모호한 상태로 남았다.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élix González-Torres)와 티노 세갈(Tino Sehgal)은, 그러한 상황을 십분 활용해 자신과 작업의 자율성 모두를 갱신하고 재통합해 냈지만, 지금까지도 예외적 존재로 간주될 따름이다.

살롱 이전의 길드 미술가들이 귀족의 작업 의뢰와 후원금에 의지해 창작하느라 자율성의 제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듯이, 오늘의 미술가들은 다문화주의적 통치 제도의 일부가 된 각종 지원금 제도와 후원 프로그램에 의지해 작업하느라 자율성의 제약에 굴복하고 있다. 할 포스터(Hal Foster)는 『디자인과 범죄 그리고 그에 덧붙인 혹평들 Design and Crime: And Other Diatribes』(2002)을 준비할 무렵, “자율성의 신화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게 아닐까?”라고 한탄하고 다녔다. 1990년대 후반의 북미에서 이미 이러한 한계 상황은 확연했다. 단지 다들 모르는 척했을 뿐. (한데, 작가 주체의 자율성과 작업의 자율성이라는 이슈에, 미술 제도의 자율성이라는 이슈까지 더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순수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을 이상향이라는 소실점에 맞춰 통합하자고 주장할 수 있는 시대는 다시 올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자율성이란 추상화한 목표를 공유하고 그를 지향하는 비판적 추동을 통해 새로운 혁신을 추구하던 시절에 형성된 힘은, 여전히 현대미술계의 대전제로서 작동 중이다.

하면, 확장된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미술관의 자율성과 소장선 구축의 자율성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가? 인식론적 순수 공간으로서의 화이트큐브를 설정해 모더니즘을 역사화하고자 했던 앨프레드 바 주니어(Alfred H. Barr, Jr., 1902~1981) 이래, 오늘의 미술관들은 다각적 제도 비판을 거쳐 포스트-화이트큐브로 변모해 왔다. 하지만 큐레이터십 차원에서 자율성의 신화를 포기하거나 해체 및 재구성한 기관을 본 적은 없다. 소장선 구축과 소장품 상설전의 차원에서는 어떨까? 자율성의 신화는 소장선 구축과 그를 통한 역사의 창출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내용과 형식이 하나라는 모더니스트들의 믿음을 전제로 한다면, 소장선의 내용과 형식도 하나로 통합돼야 했다. 하지만 소장품에 부합하는 수장고, 수장고에 부합하는 소장품이란 것은 본격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다. 미니멀리즘 작품을 영구 소장하는 미국 마파 소재 저드 재단(Judd Foundation)의 치나티 재단(Chinati Foundation)이나 디아 미술 재단(Dia Art Foundation)의 디아:비컨(Dia:Beacon)을 제외하면, 소장선의 물리적, 건축적 형식을, 특히 변형 및 생성하는 동태로서 상상하고 실현하려는 경우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술품을 수장하는 공간에서 그런 것을 구현하기 어려웠다면, 도큐먼트 아카이브에서라도 대안들이 도출됐어야 했다.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가 자신이 1900년 설립한 바르부르크 문화과학 도서관(Kulturwissenschaftliche Bibliothek Warburg)에서 지속적으로 자료의 재구조화를 시도했던 일을 상기하자면, 역사적 자료의 수장과 재구축 방식에 관한 연구와 논의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옳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부 미술관에 도입된 개방형 수장고나 수장고형 미술관들은, 순수 공간의 이면으로서 남아있던 수장고를 개방 혹은 가시화해 포스트-화이트큐브의 문법에 부합하는 새로운 시공을 창출했다.1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제스처로서 대단히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곳곳에서 대중 추수적인 방식으로 활용됐지만, 적극적으로 활용 및 연구된 경우는 의외로 드물다. 예컨대, 2003년 개관한 스위스 소재의 라우렌츠 샤울라거 재단(Fondation Laurenz Schaulager)은 수장고형 미술관을 표방하며 새로운 모델로 화제를 모았지만, 아직도 새로운 형식에 부합하는 서사 체제나 데이터베이스로서의 역사관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23

(비고: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술연구센터와 디지털정보실은 소장품자료관리과에서 맡고 있는데, 적절한 조직 운영 방식일까? 서울시립미술관의 평창동 미술문화복합공간은 어떤 운영 모델을 구현하게 될까?)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선의 역사적 헤게모니는 어떻게 형성됐는가

현대미술을 추동하는 동적 역사관이 미술관 소장선으로 구축돼 연구 및 제시되기 시작한 역사를 따지자면, 어쩔 수 없이 기준점으로 힘을 발휘해 온 뉴욕 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이하 ‘모마’)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현대미술가와 평론가와 미술사 연구자들이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으로부터 시작하는 현대미술의 역사를 당연시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국식 역사 해석, 특히 뉴욕 모마의 역사관에 따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현대미술의 패권을 쥐고 이끌어 오는 사이, 그러한 해석을 전면 부정하려는 유의미한 노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영국의 경우에 세잔은, 테이트(Tate) 소장선에는 소품 몇 점이 있을 뿐이고, 〈목욕하는 사람들 Bathers Les Grandes Baigneuses〉(1894~1905년경)을 비롯한 주요 작품은 내셔널 갤러리(The National Gallery)에 소장돼 있는데, 내셔널 갤러리의 서사 체제에서 세잔은 맨 마지막에 놓여 있다. 내셔널 갤러리는 세잔을 “현대미술의 아버지(The father of modern art)”로 소개하지만 테이트 모던의 서사에서는 서두에 놓이지 않는다.

테이트 브리튼은 소장선 주제 상설전인 《영국 미술 산책 Walk Through British Art에서, 1545년부터 오늘의 국제적 현대미술과 동시대미술에 이르는 소장선을 바탕으로, 영국 미술의 약 500년 역사를 12개 전시실에 걸쳐 제시한다. 한데, 현대의 기점은 1880~1890년대로 명확히 설정돼 있지 않다.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을 다루는 7번 전시실은 1840~1890년대를 다루고 있지만 영국의 라파엘전파를 주로 제시하고, 그 다음 8번 전시실은 1930~1940년 시기의 보잘 것 없는 영국식 절충주의 현대미술을 다룬다. 9번 전시실은 1940~1950년 시기를, 10번 전시실은 1950년대를 다루는데, 본격적인 전후 추상미술의 경향은 대체로 1950년대 중반에야 시작하니, 한국의 추상미술 운동보다 겨우 2~3년 앞서는 모습이다. 11번 전시실은 1960~1970년 시기를 다루는데,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나 앤서니 카로(Anthony Caro)가 체면을 세우고 있지만, 네오다다와 같은 실험미술의 경향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지막 12번 전시실은 다소 뜬금없지만, 갑자기 196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는 영국의 여성 미술가들을 망라해서 보여준다.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방식인데, 역사 자체를 다층적 구조로 새로 쓸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다 보니, 이런 방식으로 생색을 내고 있는 것.

따라서, 국립현대미술관처럼 분관 체제로 분산돼 있는 테이트는 여타 주제별 소장선 전시로 취약한 서사 구조를 보완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영국 미술 산책》전을 포함해 모두 14가지 주제 상설전이 운영되고 있는데, 그나마 역사의 흐름을 꿰뚫는 주제 상설전은, 테이트 모던의 《재료와 오브제 Materials and Objects와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즈의 《현대미술과 세인트 아이브즈 Modern Art and St Ives, 두 가지라 하겠다.

하면, 프랑스 본토에서 세잔의 특수한 위상은 어떤 과정을 통해 성립됐을까? 프랑스인들은 1895년 11~12월,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가 운영했던 갤러리 볼라르에서 열린 폴 세잔의 첫 개인전(불완전한 망라전(회고전)의 성격을 띠었던)에서 처음으로 세잔의 성과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약 150점이 교체 전시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도록은 발행되지 않았고 따라서 정확한 총 출품작 목록은 알 수 없다.) 데이비드 내쉬(David Nash) 등이 운영하는 전작집(catalogue raisone) 아카이브에서는 57점을 첫 번째 전시에 출품됐던 작품으로 특정하고 있는데, 당시 어느 누구도 미술관 설립과 영구적 소장선 구축을 염두에 두고 세잔의 주요 작품을 수집하지 않았다. 인생을 걸고 세잔의 작품을 추적해 카탈로그 레조네(전작집)를 발간한 미국의 미술사학자 존 리월드(John Rewald, 1912~1994)에 따르면, 세잔의 캔버스 작품은 모두 954점이고, 수채화 작품은 400여 점으로 추산되는데, 주요 작품은 미국과 영국 등 해외에 소장돼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프랑스 특유의 감식 소장가 문화와 전쟁으로 인한 애국주의의 대두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프랑스 정부는, 독일 국적의 유대인이었던 화상 다니엘-헨리 칸바일러(Daniel-Henry Kahnweiler)가 소장했던 1,500점에 달하는 현대미술품을 압수했다. 칸바일러만 이런 수모를 당한 것은 아니었다. 칸바일러의 소장선 가운데 주요 작품은, 1921년과 1923년 오텔 드루아(Hôtel Drouot)에서의 경매를 통해 매각됐고, 걸작들은 대거 미국인의 손에 들어갔다. 칸바일러도 소장품을 회수하려고 응찰에 나섰지만, 미국의 부자들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고,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의 미술관들이 경매에서 작품을 사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오늘날 프랑스 파리에서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등 모더니즘 개척자 세대의 위상을 실감하기 어려운 것은, 칸바일러 등 외국인들이 주요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년의 세잔 혹은 사후의 세잔이 현대미술의 기점으로 부상하기까지 여러 변인들이 복합 작용했지만, 요약 및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863년 《낙선전 Salon des Refusés》을 둘러싼 논란을 배경으로 삼았던 에밀 졸라(Émile Zola)의 소설 『걸작 L’Œuvre』(1886)을 통한 신비화, 2. 세잔의 개인전을 열었던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주도면밀한 프로모션, 프로듀싱(1904년 《살롱 도톤 Salon d’Automne》에서 볼라르는 세잔의 특별전처럼 뵈는 섹션을 연출했다), 3. 미국에서 온 유대계 컬렉터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과 리오 스타인(Leo Stein)의 주요 작품 구매(세잔의 유작이나 다름없었던 〈대수욕도 The Large Bathers (Les Grandes Baigneuses)〉(1900~1906)는 리오 스타인의 손에 들어가 한동안 스타인 오누이의 살롱에 걸려 있었다. 1937년 윌리엄 윌스타치(William P. Wilstach) 기금을 통해 필라델피아 미술관(Philadelphia Museum of Art)의 소장품이 됐다), 4. 〈대수욕도〉에 자극을 받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가 그린 〈삶의 환희 Le bonheur de vivre〉(1905~1906)가 1906년 《독립 미술가 살롱 Salon des Indépendants》(소위 ‘앙데팡당’)전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으며 상찬된 일, 5. 마티스의 해석에 반감을 품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와 칸딘스키가 각각 〈아비뇽의 처녀들 Les Demoiselles d’Avignon〉(1907)과 〈“구성 II”를 위한 스케치 Skizze für “Komposition II”〉(1909~1910) 및 〈구성 II Komposition II〉(1910)를 제작한 것.

프랑스의 구세대 미술인들은 세잔을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삼는 미국식 해석에 대비되는 역사관을 갖고 있기는 했다. 사실상 그룹전을 연 적이 없는 입체파보다 실제로 그룹 운동으로 작동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던 야수파를 중시하는 가운데, 야수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마티스에 영향을 미친 스승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를 현대미술의 진짜 아버지로 여기는 것.4 문제는, 그런 역사관을 그려내는 정전화된 소장선이 프랑스 파리에선 구축되고 제시된 적이 없으니 (혹은 그런 역사관을 제시하는 미술사 저작이 출간된 적이 없으니), 프랑스 밖의 미술인들이 모로를 기준점 삼아 현대미술의 역사를 재고찰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신미술사학과 탈식민주의 비평의 대두 이후, 많은 논자들이 1880~1890년대의 세잔에서 출발하는 뉴욕 모마의 정전화한 모더니즘을 비판해 왔다. 하지만 그 정전화한 체제가 어떻게 형성됐고 또 작동해 왔는지 분석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모마 소장선의 특징은 순수미술의 자율성 신화를 전제로 삼아 현대미술과 현대디자인의 추상성 혹은 추상화를 바탕으로 한 진보의 흐름을, 하나의 얼개로 통합해 냈다는 데 있(었)다. 앨프레드 바 주니어는 1929년 27살의 나이에 모마의 초대 관장으로 임명되면서,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의 학위 논문 「현대미술에서의 기계 The Machine in Modern Art」를 중도 포기했는데, 그의 미완성 논문은 이후 그대로 모마 소장선의 구축 방침이 됐다.

모마가 개관한 1929년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시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종결된 이후로부터, 약 1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즉 미국인들이 ‘우리가 유럽의 질서를 재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유럽산 현대미술을 공격적으로 수집하고 탐구하기 시작한 지 10년 만에 미국의 뉴욕에 현대미술관이 나타난 것이었다. 바 주니어는 1936년 《큐비즘과 추상미술 Cubism and Abstract Art전(1936.3.2~4.19)을 통해 모더니즘과 진보의 동역학에 대한 비평적, 역사적 얼개를 제시하며 모마에 기념비적 위상을 부여했다. 프랑스인들이 큐비즘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일을 망설이는 동안, 미국인들은 적극적으로 작품을 수집했고, 또 새로운 관점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큐비즘과 추상미술》전은 시점도 절묘했다. 독일을 장악한 나치 정권이 이듬해인 1937년 《퇴폐 미술 Entartete Kunst》전을 기획해 추상미술을 탄압했기 때문에, 모마는 한동안 나치의 프로파간다 미술에 맞서는 순수미술, 즉 자율성을 심화하며 추상으로 진화하는 자유주의 현대미술의 수호성인처럼 뵀다.

바 주니어는 《큐비즘과 추상미술》전에서 추상미술의 전개 과정을 변증법적으로 정리해 입체파 미술의 중요성을 밝혔고, 그 얼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다이어그램을 제시해 도록의 표지에 게재했다. 이 도표는 지금까지도 미술 대학의 교과 과정에서 현대미술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긍정적인 의미에서라기보다는 비판적 독해의 대상으로 소환되는 것이 보통이다.5 하지만 이 전시의 얼개와 다이어그램이 있었기에, 미국 내에서 모더니즘이 본격적으로 논의될 수 있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1937년 평문 「아방가르드와 키치 Avant-Garde and Kitsch」는 이 전시가 없었다면 그렇게 대대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을 터. 6)

하지만 《큐비즘과 추상미술》전의 바탕이 됐던 과학기술주의적 역사관은 증거를 필요로 했다. 바 주니어의 과학주의적 세계관은 신인상주의 담론의 창시자였던 무정부주의자 펠릭스 페네옹(Félix Fénéon, 1861~1944)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되는데, 다른 점은 미국의 과학 기술 사물의 조형적 진화로부터 현대미술을 추동하는 힘과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점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현대미술가들이 당대의 산업 기술로부터 영감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던 페네옹을 닮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은 터였다.

바 주니어는 1927년 하버드 대학교의 동료들과 독일 데사우의 바우하우스를 처음 방문했다. 건축가 겸 큐레이터 필립 존슨(Philip Johnson, 1906~2005)은 1932년 25살의 나이로 모마의 건축부 부장직을 맡은 이후 꾸준히 바 주니어의 오른팔 역할을 했고, 1927년부터 1933년 폐교 때까지 바우하우스를 반복 방문했다.7 (23살이었던 1930년엔 미국으로 초청한 루드비히 미즈 판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에게 자신과 바 주니어의 아파트를 새로 디자인하는 일을 맡기기도 했다. 바 주니어의 집을 바우하우스식 모더니즘의 견본 주택으로 삼으려는 포석이었다.)

미국이 바우하우스의 유산을 집어삼키는 과정에선 하버드 대학교 출신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30년 12월 3명의 하버드 졸업생 링컨 커스틴(Lincoln Kirstein), 에드워드 와버그(Edward M.M. Warburg), 존 워커 3세(John Walker III)이 하버드 동시대 예술 협회(Harvard Society for Contemporary Art)의 명의로 바우하우스의 성취를 소개하는 전시를 기획해 개막했는데, 이는 독일 밖에서 열린 최초의 바우하우스 전시였다. (1947년에는 하버드에 ‘바우하우스 연구 소장선(Bauhaus Study Collection)’이, 1949년에는 ‘리오넬 파이닝거 아카이브(Lyonel Feininger Archive)’가 설립됐고, 1950년에는 역시 하버드에 훗날 ‘발터 그로피우스 아카이브(Walter Gropius Archive)’가 되는 소장선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즉, 《큐비즘과 추상미술》전의 바탕이 됐던 과학기술주의적 역사관은, “예술과 기술—새로운 통합(Kunst und Technik—Eine neue Einheit)”을 슬로건으로 삼았던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그 당위의 증거물을 모으는 과업은 바 주니어를 추종하고 존경했던 필립 존슨의 몫이었다.

존슨은 뉴욕 모마에서의 첫 전시로 《현대 건축: 국제주의전 Modern Architecture: International Exhibition》(1932)을 기획했고, 두 번째 전시로 《초기 현대 건축: 시카고 1870~1910 Early Modern Architecture: Chicago 1870–1910》(1933)을 열었으며, 다섯 번째 전시로 《오브제: 1900년과 오늘 Objects: 1900 and Today》(1933)을 기획했다. 발터 그로피우스의 역사관을 소개하고, 그에 영감을 준 미국의 버내큘러 고층 빌딩 문법을 역사화하고, 아르누보와 현대디자인(릴리 블리스(Lillie P. Bliss) 소장품을 중심으로 한)을 비교해 탈장식적 기능주의의 중요성을 설파하고자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 주니어가 주장하는 ‘현대미술에서의 기계’를 방증하는 전시를 만드는 과제였다. 존슨이 모마 학예실의 건축부 부장으로서 기획한 전시 가운데 가장 문제적이었던 전시는 《기계 예술 Machine Art(1934.3.6~4.29)이었다. 기어, 플라이 휠, 부싱, 볼베어링, 플라스크, 비커, 스프링, 와이어 로프, 프로펠러, 당구공, 디저트 스푼, 금속관 구조의 의자, 금전 등록기, 진공청소기, 전기 토스터, 엑스레이 기계 등 400여 물품을 추상미술 작품처럼 전시해 큰 화제를 모았다.

《기계 예술》전에 훌륭한 미적 오브제로서 선별되고 전시된 제품들은 대부분 동시대 버내큘러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는 기계적 오브제들이었고, 오직 53개의 품목만 디자이너 디자인에 해당했다. (전시에 제 디자인을 전시할 수 있었던 디자이너는 고작 18인이었다.) 필립 존슨은 이 전시를 통해 시대의 새로운 추상적 미감(대체로 유럽의 아방가르드 조형에서 연원하거나 그에 부합하는 어떤 규준을 따르는)을 제시하고 그를 통해 대중을 교육시키겠다는 아주 분명한 의지를 갖고 있었고, 또 생물체처럼 진화하는 인공물의 세계에서 최적화 단계에 도달한 결과물들을 보여 주게 됐다. 기획은 전시 제목을 정해 놓고 시작됐고, 일단 디자이너가 없는 사물들을 조사해 목록을 만든 뒤, 그 규준에 부합하는 디자이너 디자인을 찾아 추가했다. 1991년 뉴욕 모마의 구술사 인터뷰 아카이브에 따르면, 존슨은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다. “우리는 이름 있는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오브제를 찾고자 애썼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래서 사물의 아름다움은 디자인보다는 그저 다른 힘(other forces)의 결과라는 분명한 사실을 강조하는 편이 좋겠다고 느꼈다.”

설립 초기, 모마의 미션 가운데 하나는 유럽의 진보적 조형 이념과 그 성과를 미국에 소개하고 교육하는 데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기계 예술》전도 철저히 대중(미국의 디자이너들을 포함한) 계몽의 자세를 유지했다. 전문가들을 초빙해 전시 물품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오브제를 선별하는 행사를 갖는 한편, 전시 기간 내내 관객 투표를 통해 대중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오브제를 선발했다. (전문가가 선별한 아이템(1등이 스틸 스프링, 2등이 알루미늄 선외 프로펠러, 3등이 볼 베어링이었다)과 대중이 선발한 아이템(1등이 카를 차이스 사의 삼각 프리즘 모양의 해양 신호용 거울, 2등이 고광택 청동 프로펠러(선박용), 3등이 알루미늄 비행기 프로펠러였다)의 차이는 다시 계몽의 필요성을 입증하는 증거처럼 활용됐다.) 미술관은 전시됐던 400여 물품 가운데 100여 점을 구매해 디자인 소장선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이후 이를 소규모 버전의 《기계 예술》 전시로 꾸며 4년간 미국 전역을 순회시킴으로써 유럽발 ‘고급 기계 미감’을 교육하고 홍보했다.

게다가 《기계 예술》전은 기능에 최적화한 동시대 버내큘러 공업 사물의 사례에서 진화하는 추상성과 그 아름다움을 발견 및 제시했기에, 미국인 디자이너들의 입장에선 그것을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 디자인의 초기안들, 그리고 1930년대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맹목적 유선형 디자인과 비교해 보는 뜻깊은 성찰의 계기가 됐다. 추상미술을 개척하고 세련된 탈장식의 디자인 문법을 만든 것은 유럽인들이었지만, 의사 진화하는 공업 사물에서만큼은 미국을 따를 곳이 없었다는 점이 미국인들에게 어떤 심리적 위안감 이상의 자신감을 불러일으킨 것 또한 사실이었다.8

그러므로 《큐비즘과 추상미술》전은 《기계 예술》전이 입증하고자 했던 ‘과학 기술의 발전을 따르는 기능적 최적화의 힘’과 함께 고찰할 때 비로소 그 핵심을 드러낸다. 큐비즘을 중심으로 모더니즘의 형성 과정을 해설하고, 또 왜 미국 사회가 위기에 처한 유럽의 모더니즘을 포용해 미국의 자산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설득하고 있지만, 진짜 핵심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에 있었다. ‘이미 ‘기계 미학’(필립 존슨이 그저 ‘다른 힘(other forces)’이라고 회고했던)이라고 하는 시대적 힘은 미국을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으니, 예술과 기술의 통합이라는 유럽식 비전을 미국의 과학 기술 중심주의를 바탕으로 업데이트하면, 미국이 현대미술로도 세계를 제패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9

모마의 전후 모더니즘은 어떻게 형성됐으며 약점은 무엇인가

전후의 뉴욕 모마는 《대형 현대 회화 Large-Scale Modern Paintings전(1947.4.1~5.4)을 시발점 삼아 유럽의 모더니즘, 특히 초현실주의를 초극하는 서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큐레이터 마가렛 밀러(Margaret Miller, 모마에서 1943년부터 1955년까지 큐레이터 겸 설치 전문가 역임)는 바 주니어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북미의 모더니즘이 부상하고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벤 샨(Ben Shahn)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로부터 영향을 받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을 강조했는데, 이 전시를 계기로 폴록은 특별한 미술사적 위상을 차지하게 됐다. 당시 출품된 폴록의 작품이 1943년작 〈벽화 Mural〉였다.10

당시 모마의 보도자료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최선을 다해 공들인 커다란 그림들은 화가들의 자기 확신과 미학적 신념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회화 자체의 중요성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확증한다. … 이 전시는 대형 그림들이 어떤 기능에 부합하는지, 그려진 양식들은 어떠한지, 포착하고 있는 경험과 주제들은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기획됐다. 따라서, 전시 설치에 도입된 확 트인 조망은 이중의 가치를 지니는데, 이번 전시 출품작의 절반 이상을 개별적으로 분리시키면서도, 벽을 넘나들며 유사하고 상반된 그림들 간의 해석을 자유로이 해볼 수 있도록 한다.11

사실 모마는 1958년 4월 15일 대형 화재 사건을 겪을 때까지만 해도 전후 모더니즘의 역사에 대한 헤게모니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는 아니었다.1213 바 주니어의 총애를 받았던 큐레이터 도로시 밀러(Dorothy C. Miller)가 1942년, 1946년, 1952년, 1956년, 1959년, 1963년, 모두 6차례에 걸쳐 미국인 미술가 기획전 시리즈를 기획 및 진행하며, 미국만의 서사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지만, 헤게모니의 공식화는 1959년에 이뤄졌다. 1959년은 결정적인 해였다. 1958년 5월 21일 쿤스트할레 바젤(Kunsthalle Basel)에서 개막해 8개국을 순회한 《뉴 아메리칸 페인팅 The New American Painting》전의 귀국 보고전이었던 《1958~1959년 유럽 8개국을 순회한 뉴 아메리칸 페인팅 The New American Painting as Shown in Eight European Countries 1958–1959전(1959.5.28~9.8)은 역시 도로시 밀러가 기획했는데, 이 전시를 통해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는 초현실주의의 지역 버전이라는 딱지를 떼고 독자성을 띠는 역사적 성취로 정전화됐으며,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은 잭슨 폴록을 뛰어넘는 대가로 평가받게 됐다.1415

당시 미국식 모더니즘의 진화 역학을 홍보하는 일에서 모마는 다소 뻔뻔한 면보를 뵀다. 다음은 보도자료의 일부다.

《뉴 아메리칸 페인팅》이라는 제목의 전시가 1년에 걸친 유럽에서의 성공적 순회전에 이어 맨해튼 53번가 11웨스트에 있는 현대미술관에서 5월 28일부터 9월 8일까지 열린다. 해외를 순회한 미술관의 국제 프로그램 전시가 뉴욕에서 개막하는 것은 처음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지난 7년간 전개된 미술관의 교류 프로그램의 전모를 제시하는 벽화 크기의 지도가 추가되는데, 이 프로그램에는 51개국에서 열린 회화와 조각, 건축과 디자인, 판화, 사진, 영화 등 60개 전시에 461점이 포함됐다.16

《1958~1959년 유럽 8개국을 순회한 뉴 아메리칸 페인팅》전의 문제의식은 몇 달 뒤 《16인의 미국인 16 Americans전(1959.11.16~1960.2.17)으로 이어졌다. 도로시 밀러는 제이 드피오(Jay DeFeo), 월리 헤드릭(Wally Hedrick), 제임스 자베이스(James Jarvaise), 재스퍼 존스(Jasper Johns), 엘스워스 켈리(Ellsworth Kelly), 앨프레드 레슬리(Alfred Leslie), 랜디스 르위틴(Landès Lewitin), 리처드 리틀(Richard Lytle), 로버트 멀러리(Robert Mallary), 루이스 네벨슨(Louise Nevelson), 로버트 라우션버그(Robert Rauschenberg), 줄리어스 슈미트(Julius Schmidt), 리처드 스탠키위츠(Richard Stankiewicz),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앨버트 어번(Albert Urban), 잭 영거맨(Jack Youngerman)의 작품을 통해 추상표현주의 이후의 전개를 명확히 제시해 냈고, 이 전시를 통해 로버트 라우션버그와 재스퍼 존스는 시대의 총아로 부상했다. 라우션버그는 초현실주의를 타자 삼았던 추상표현주의자들과 달리, 초현실주의의 모태가 됐던 다다를 타자 삼아 네오다다의 장을 창출한 인물. 그 덕분에 전후 미국 모더니즘의 장은 더 폭넓게 확대됐고, 더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매체 실험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더 쉽게 말하면, 1959년은 추상표현주의가 역사로 정리됨에 따라, 새로운 흐름을 이끄는 다음 세대의 작가들에게 바통이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의 개막을 알렸던 《16인의 미국인》전에서 가장 특기할만한 존재는 라우션버그가 아니라 역사학을 전공한 23살의 신인 프랭크 스텔라였다. 그는 미니멀리즘의 개막을 예고하는 작품을 통해 전후 모더니즘의 논리를 메타 분석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다음은 모마의 자가 해설이다.

모마의 선구적 큐레이터인 도로시 밀러는 창의적인 예술적 재능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능력으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봐도 《16인의 미국인》전을 통해 매우 특별한 것을 기획해 냈다는 점은 자명했다. 뛰어난 미국인 동시대 작가들을 소개한 1959년의 이 전시는 미국인 작가 기획전 시리즈 가운데 다섯 번째 프로그램이었다. 전시 도록에서 밀러는 전시를 “비범하게 신선하고, 풍부하게 다양하며, 젊고 활기차다”고 소개했다. 로버트 라우션버그의 콤바인 페인팅, 재스퍼 존스의 깃발과 표적, 특히 23세의 프랭크 스텔라가 그린 거의 단색에 가까운 흑색 그림 4점 등은 일부 짜증이 난 보수 경향의 비평가들로부터 어리석은 작품들이라고 혹평을 받았지만, 전시된 작품들은 획기적이었다. 밀러가 잡은 기회는 이후 엄청난 미적 자본을 파생시켰다. 처음에는 논란이 있었지만, 이 전시의 출품작은 앞으로 다가올 10년간의 절충주의와 실험을 위한 장을 약속했으며, 머잖아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로 자리매김할 터였다.17

모더니즘의 논리를 메타 분석해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을 도출하는 과정에서도 모마는 《실재성의 예술: 미국 1948~1968 Art of the Real: USA 1948–1968(1968.7.3~9.8, 유진 구센(Eugene Goossen) 기획으로, 1968~1973년 모마 재직), 회고전 《바넷 뉴먼 Barnett Newman(1971.10.21~1972.1.10, 토마스 헤스(Thomas B. Hess) 기획으로, 1969~1972년 모마 재직), 《공간들 Spaces(1969.12.30~1970.3.1, 제니퍼 릭트(Jennifer Licht) 기획으로, 1968~1975년 모마 재직), 《프로젝트: 칼 안드레 Projects: Carl André(1973.4.10~5.13, 제니퍼 릭트 기획) 등의 기념비적 전시들을 통해 역사적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헤게모니를 강화해 가던 모마에게도 딜레마는 있었다. 순수미술 소장선과 순수디자인 소장선을 하나로 중첩시켜 사고하던 바 주니어의 대계는, 미국 모더니즘의 자율성을 강조해가는 흐름 속에서 효과적으로 업데이트되지 못했다. 1943년 모마의 이사장이었던 스티븐 칼튼 클락(Stephen Carlton Clark)이 바 주니어를 관장에서 해고하고, 자문 역할만 맡기게 되면서, 이미 문제는 예고됐던 셈이었다. 회화와 조각 분과의 학예실도, 건축과 디자인 분과의 학예실도 모두 바 주니어의 얼개를 계승했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자율성 심화의 역사를 써 나갔을 뿐으로, 통합적 비전의 업데이트는 시도되거나 논의되지 않았다.

물론, 주요 고비마다 혁신적 전시가 만들어지기는 했다. 가장 특기할 만한 시도는 초청 큐레이터 폰투스 휠텐(K.G. Pontus Hultén)(보조 큐레이터 제니퍼 릭트)이 기획한 《기계 시대의 끝에서 본 기계 The Machine as Seen at the End of the Mechanical Age(1968.11.27~1969.2.9)였다. 후기산업사회가 도래하는 시점에서 기계 산업 시대와 현대예술의 상관 관계를 고찰하는, 즉 현대미술과 기술문명 사이의 연동성을 역사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전시였다. 즉, 현대미술을 산업 시대의 기계 미학을 통해 독해해 냈던 바 주니어의 관점을, 탈산업 시대의 도래를 앞둔 시점에서 새롭게 업데이트하는 의미를 띠고 있었다. 당시 휠텐은 산업 시대의 현대미술 작품과 산업 시대의 기능적 디자인 사물들을 상호 대비되도록 공간을 연출했는데, 이러한 복합 연출은 2015년에야 모마에 부분 도입됐다. 모마는 오래도록 회화 및 조각 분과, 판화 및 드로잉 분과, 건축 및 디자인 분과 등이 각각 따로 소장선 전시를 제시해 왔는데, 2015년 처음으로 1960년대 소장품 섹션에서 통합 큐레이팅을 시도했다.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인물은 학예실장 앤 템킨(Ann Temkin)이었고, 그녀는 2019년 10월 21일 모마 재개관에서도 소장선의 통합 연출을 관철해 냈다. 건축과 디자인 소장선은 서사적으로 이어지는 소장선 전시 사이에 간헐적 군집을 이루는 방식으로 절충적 양태의 독립성을 유지했는데, 그 결과는 다소 참담했다. 현대미술의 역사와 현대디자인의 역사가 서로의 논리를 지지 및 강화하는 모마 특유의 2중 서사는 성공적으로 업데이트되지 못했고, 디자인 소장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 이후 현실과 동떨어진 의사 예술을 제시하는 한계만을 드러내고 말았다.18

앨프레드 바 주니어가 아꼈던 키내스턴 맥샤인(Kynaston McShine, 1935~2018)도 바 주니어의 모더니즘과 과학기술주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전시 《정보 Information》(1970.7.2~9.20)전을 만들며 퍼스펙티브의 업데이트에 한몫을 했다. 《정보》전의 키워드는 산업 시대의 기계 미학이 아니라 컴퓨팅 시대의 정보 미학이었다. 맥샤인은 소장선 큐레이터로서 전후 실험미술, 미니멀리즘, 개념미술을 아우르는 소장선을 알차게 가꿔 나갔지만, 학예실장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탓에 그의 영향력은 건축 및 디자인 분과에 미치지 못했다.19 기술 변동의 전환점에 새로운 진보의 향방을 짚어 낸 또 다른 모마의 전시는 필립 존슨과 마크 위글리(Mark Wigley)의 1988년 기획전 《해체주의 건축 Deconstructivist Architecture》이었다. 모마는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 1932~), 프랭크 게리(Frank Gehry, 1925~),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 쿱 힘멜블라우(Wolf D. Prix 외, 1942~), 렘 콜하스(Rem Koolhaas, 1944~) 등을 한자리에 소환했고, 이 전시는 컴퓨팅 설계 및 시뮬레이션 작업 환경을 통한 새로운 ‘메타 어프로치(meta approach)’의 가능성을 예언하는 자리가 됐다.

한편, 키내스턴 맥샤인이 남긴 마지막 업적은 1999년의 기획전 《뮤즈로서의 미술관: 미술가는 성찰한다 Museum as Muse: Artists Reflect》였다. 제도 비평적 미술 이래의 경향을 총정리한 이 기획전은 담론적 장소성을 탐구하던 동시대미술의 경향에 마침표를 찍고, 관계미술의 태동과 도약에 발판 노릇을 했다. 큐레이팅의 계보로 보자면, 애초에 바 주니어의 화이트큐브가 화이트큐브 비판 담론과 미술 창작의 실험을 가능케 하는 대전제가 됐던 셈이었으므로, 이러한 기획은 바 주니어의 화이트큐브를 포스트 화이트큐브로 업데이트해 내는 성격을 띠고 있기도 했다.

“뮤즈로서의 미술관”이라는 의제를 “뮤즈로서의 미술관 소장선”으로 고쳐보면 어떤가? 소장선을 재료와 지지체로 삼는 예술적 시도의 계보를 생각하면, 마르셀 브로타스(Marcel Broodthaers)의 메타 뮤지엄 《현대미술관, 독수리부, 19세기 섹션 Musée d’Art Moderne, Départment des Aigle, Section XIXème Siècle(1968)에서 구겐하임 미술관의 설립 60주년 기념전 《예술적 특권: 구겐하임 소장선에 대한 6가지 해석 Artistic License: Six Takes on the Guggenheim Collection에 이르는 흐름이 모습을 드러낸다. 2019년 ‘뉴 모마’를 표방하며 재개관한 모마가 소장품 상설전 속의 특별전으로 제시한 《모양의 모양—작가의 선택: 에이미 실먼 The Shape of Shape—Artist’s Choice: Amy Sillman(5층의 516번 섹션)도 마찬가지다.

모마는 2010년대 중반 좀비 형식주의 미술의 개척자로 재평가, 재조명된 레즈비언 화가 에이미 실먼을 큐레이터로 초빙해, 소장선의 재해석을 통한 새로운 비전의 포용을 연출했는데,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실먼은 모마의 소장선 가운데에서 모마 특유의 형식주의 논리에 부합하지 못하는 모호함을 띠고 있는 작품 71점을 선별해 일종의 ‘경이의 방(Wunderkammer)’을 꾸몄다. 그래서 키워드가 ‘형태, 형식(form)’이 아니고 ‘모양(shape)’이다. 레즈비언 거장 실먼은 이 전시를 위해 DIY 잡지(누구나 다운로드 받아서 무료로 볼 수 있는)를 제작했는데, 화가 특유의 ‘썰’이라 아주 재밌지만, 왜 ‘모양’은 ‘형태, 형식’에 비해 비본질적인 가치로 여겨졌는지를 따지는 흥미로운 담론을 담고 있다. 즉, 실먼은 소장선의 역사를 작성하는 기준을 재설정해 소장선 사이에서 타자화된 존재들을 재발견하고 재평가해 낸 셈이었다.

모더니즘의 리셋을 주장하는 모마의 새로운 소장선 제시, 그 모순과 한계

2019년 10월 21일 재개관한 모마는 모더니즘의 다원적, 다층적 역사를 포괄하는 ‘뉴 모마’를 추구한다며, 더 다양한 관점과 목소리를 반영하는 미술관으로 거듭나겠다고 공언했다. 파격적 기획을 여럿 준비했지만, 핵심은 확장 및 재편된 소장선 전시였다. 탈식민국가의 전후 모더니즘 작품을 비롯해 여성, 흑인, 성소수자 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포함시키며 ‘정치적으로 더 올바른’ 역사를 포착하고자 애썼고, 또 6개월마다 1/3을 교체 전시하며 끝없이 갱신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노라 약속했다. 원래 2020년 5월에 예고됐던 소장품 상설전 업데이트는 코로나19 사태로 개막을 못했지만, 모마는 62개의 갤러리 가운데 무려 20개의 방을 새로 꾸미겠다고 발표한 바 있었다. 전 세계 어느 주요 미술관에서도 본 적이 없는, 새롭고, 성실한 면모이긴 했다.

대표 소장품 375점을 선별해 안내하는 책자에도 과거엔 볼 수 없던 170점의 작품이 새로 교체, 수록됐는데, 과거와 달리 10인 작가의 대표작 10점을 특선해 (스프레드 페이지의 형식으로) 명확히 강조해 놓았다.20 그 주인공 10명은 다음과 같았다.

  1.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
  2.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
  3. 찰스 호세인 젠더루디(Charles Hossein Zenderoudi, 1937~): 전후 이란 모더니즘의 패자
  4.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
  5. 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 Arata Isozaki, 1931~): 〈재폐허화된 히로시마 Re-ruined Hiroshima〉(1968)를 전제로 모더니즘의 해체 및 재구성과 초극을 추구한 일본인 건축가
  6. 알마 우드시 토마스(Alma Woodsey Thomas, 1891~1978): 추상표현주의 색면추상화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7. 이본 라이너(Yvonne Rainer, 1934~): 미니멀리즘 안무가,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미국인 여성
  8. 브라이스 마든(Brice Marden, 1938~)
  9. 부크라 칼릴리(Bouchra Khalili, 1975~): 탈식민주의 비평 성향의 지역 기반 조사 연구형 작가, 모로코계 프랑스인
  10. 카라 워커(Kara Elizabeth Walker, 1969~): 탈식민주의 비평 성향의 페미니스트 작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이들 가운데 약 5명이 대안 미술사적 선택에 속하니, 그간 모마를 ‘백인 이성애자 남성 중심적 기관’으로 비판해 온 사람들이 머쓱해질 지경이었다. 이러한 자기 파괴적 혁신을 통해 모마는 무엇을 얻었을까? 상징적, 실질적 주도권이다. (대안적 사례로 제시된 5명 가운데 맥락이 다소 다른 인물이 하나 있기는 했다. 찰스 호세인 젠더루디. 도널드 트럼프 집권 초기였던 2017년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 명령’에 항의하는 뜻으로 모마의 학예실은 영구 소장선 전시에서 피카소, 마티스 등 주요 작품 7점을 치우고, 이란, 이라크, 수단 작가들의 현대미술 7점을 놓았다. 그때 등장했던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찰스 호세인 젠더루디였다.)

세계 최초로 통합, 변동형 역사 해석의 틀을 장착한 모마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문을 닫기 이전까지) 과거 전성기의 헤게모니에 필적하는 힘을 성공적으로 회복하는 모습이었다. 유로화 번영기에 세를 과시했던 유럽 현대미술관계는, 앉은 자리에서 구태가 된 셈이었다. ‘미국 중심의 전후 미술사에서 벗어나 다원적 세계 미술의 역사를 그려 나가는 시대가 온다’던 탈냉전 시기의 호언들은 한때 실현되는가 싶었지만, 놀랍게도 공염불로 그쳤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의 신질서 속에서 1993년 미국의 빌 클린턴 정부가 등장하고, 1992년의 LA 폭동의 충격 속에서 다문화주의가 미국의 통치 전략으로 대두하면서, 모마는 시대 변화에 호응하지 못하는 공룡 같은 존재로 비춰지기도 했다. 전 지구화의 흐름 속에서 국제 비엔날레 제도에 이스탄불, 광주, 상하이 등이 영역 확장에 기여하고, 유로화 공동체의 등장 속에서 범유럽 지향의 현대미술관들이 신설 및 신축되면서, 또한 21세기에 접어들어 현대미술계가 아트페어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모마는 과거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2008년의 금융위기로 야기된 미술관계의 판도 변화를 잘 극복하면서, 모마는 패러다임 갱신, 재창출의 기회를 잡았다. 2014년 3월 개축 계획의 초안을 발표하기 전부터 라우리 관장은 모더니즘의 리셋을 전제로 한 미술관 소장선의 재편을 염두에 두고 과거에는 포용하지 않았던, 못했던 종류의 작품을 공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마가 패러다임 교체를 당위로 삼아 주도권을 재창출하는 모습은, 위기 때마다 기술 혁신을 통해 경제 패러다임을 교체함으로써 타국의 산업을 인위적으로 퇴물화하고 (주식 시장에서) 타국의 기업 가치를 반토막내 온 미국의 과학, 기술, 경제, 정치, 외교 복합체를 쏙 빼닮았다.

뉴모마의 정치적으로 더 올바른 접근법은 일단 모두를 만족시킨 것처럼 뵀다. 하지만 바 주니어 이래의 과학기술주의적 진보사관과 그에 부합하는 현대미술, 현대건축, 디자인 소장선의 2중 서사라는 얼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보면, 과거 뉴 뮤지엄(New Museum) 등이 추구했던 대안적 역사 탐구 방식, 탈식민주의 비평, 페미니스트 비평 등을 포괄해 내는 갱신된 모더니즘, 즉 변형 모더니즘 체제를 창출해 낸 셈이다. 특히 기만적인 것은 각 방의 명칭과 구성 방식이다. 미술 사조와 운동의 이름을 모두 떼어내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더 올바른 방법 같지만, 현대미술의 역사와 동역학을 파악하지 못한 청소년, 청년들에게 이는 장벽으로 작동한다. 즉, 현대미술의 역사와 동역학을 파악한 엘리트와 아닌 사람 사이의 독해력 차이를 더 크게 벌리는 문제를 일으킨다. 결국 시비를 거는 비판적 접근을 차단하는 수동적 공격의 방어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방의 구성에서도 바 주니어 이래의 형식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형식주의의 역사로 포괄되지 않았던 타자적 존재들을 골고루 포용하는 모습을 연출해야 하니, 각 방엔 2중의 레이어가 장착될 수 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미술 전문가조차 형식주의의 얼개를 기억하는 구세대 엘리트만이 그 구조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 예컨대 뉴 모마 4층의 403번 전시실 “액션 페인팅 I”과 405번 전시실 “액션 페인팅 II”는, 이름만으로는 역사적 위상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깨닫기 어렵다. 추상표현주의라는 사조의 이름을 창작 방법으로 치환한 것은 그렇다 쳐도, 왜 어떤 작가는 포함되고 어떤 작가는 제외되는지 맥락을 읽는 것은 미술 전문가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 추상표현주의자 리 크래스너(Lee Krasner)의 1949년작 〈무제〉와 헤다 스턴(Hedda Sterne)의 1954년작 〈뉴욕 8 New York VIII〉(스프레이를 사용한 작품)은 403번 전시실에 들어갔지만, 여타 여성 추상표현주의자들은 405번 전시실에 배치됐다. (크래스너는 405번 전시실에서 다시 또 등장한다.) 특히 경쟁 관계에 있었던 그레이스 하티건(Grace Hartigan), 조안 미첼(Joan Mitchell),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는 모두 공히 1957년작으로 대비를 이루도록 연출했다.2122 1956년에 잭슨 폴록이 죽었고, 1957년 여성 추상표현주의자들의 도약이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기에 1957년을 기준점으로 삼은 것이다. (『라이프 Life』 매거진 1957년 5월 13일자 기사 「Women Artists in Ascendance—Young Group Reflects Lively Virtue of U.S. Paintings」가 결정적이었다.)

한데, 정작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독일 태생의 미국인 남성 화가 한스 호프만(Hans Hofmann, 1880~1966)은 뉴 모마의 서사에서 은폐됐다. 호프만은 1943년 푸어링(poruing) 기법과 드리핑(dripping) 기법을 처음 시도했고, 1944년 스패터링(spattering) 기법을 실천했던 위대한 개척자이자 교육자였지만, 이제는 청년 미술인들 사이에서 낯선 존재가 되고 있다. 잭슨 폴록의 전면추상화에 영향을 미친 마크 토비(Mark Tobey, 1890~1976)도 뉴 모마의 소장선 얼개에서 제외됐다.23 즉, 정치적으로 올바른 서사가 실제로 더 공정한 것만은 아니라는 뜻. 과연 403번 전시실과 405번 전시실에서 전개된 다층적 힘겨루기의 과정과 결과를 읽어낼 수 있는 관객은 몇이나 될까? (게다가 404번 전시실 “색의 평원(Planes of Color)”은 재구성된 색면추상 관련 전시실이다. 403, 404, 405번으로 연결되는 재해석 서사로 처음 전후 미술사를 접한 청소년, 청년은 앞으로 역사를 어떻게 독해하게 될까?) 뉴 모마의 새로운 다중적 모더니즘의 얼개에 관해 여러 논의와 비평이 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기회가 사라졌다. 따라서 여타 탈식민 국가의 미술관들은 이에 대응하는 수정 전략을 세우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사실 뉴 모마의 새로운 소장선 서사에서 가장 특이한 방 가운데 하나가 407번 전시실 “프랭크 오하라, 점심시간 시인(Frank O’Hara, Lunchtime Poet)”이었다. 모마의 게이 큐레이터였던 프랭크 오하라(1926~1966)에게 바쳐진 이 방은 미국인이 아닌 관객들에겐 다소 생뚱맞게 느껴지기도 했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은 꾸준히 고인을 재조명해 왔지만, 미술 전문가들도 프랭크 오하라를 잘 모르는 마당에. 프랭크 오하라는 시대를 앞선 오픈리 게이, 즉 숨김없는 게이였고, 1956년에 만난 발레리노 빈센트 워렌(Vincent Warren)과 장기적 연인 관계였다. 화가 래리 리버스(Larry Rivers)와도 잠깐 연애를 했지만. 뛰어난 안목과 열정의 소유자였던 그는 시인이자 큐레이터로서 여러 예술가들(특히 그레이스 하티건처럼 상대적으로 소외돼 있던 여성 추상미술가들)을 연결하고 또 응원했지만, 만 40세로 요절했다. 1966년 7월 24일 새벽에 파이어 아일랜드에서 친구들과 함께 비치 택시를 타고 이동한 뒤 홀로 하차했다가, 지프에 치어 큰 부상(간 파열)을 입었고, 다음날 사망했던 것.24 한데, 이런 심층적 층위와 스토리텔링은 어디까지 유효할까?

미술관 소장선의 담론적 층위에서 타자성을 발굴해 그에 가시성을 부여하고, 그를 통해 주변부화했던 하위 주체에게 힘과 목소리를 부여하는 전략은, 이제 모마 같은 주류 미술관이 구사하는 방법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대안공간이나 대안적 미술관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탈식민주의 비평을 무기 삼아온 탈식민 국가의 주요 미술관들은 어떤 대응을 통해 상대적 진보의 우위를 되찾을 수 있을까?

한국의 현대미술관들은 국가주의, 지역주의 소장선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쯤에서 우리는 모마의 헤게모니를 창출해 낸 키워드 ‘기계 미학’ 을 염두에 둔 채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건축, 디자인, 공예 소장선은 미술관의 중심이 되는 현대미술 소장선과 어떤 관계항을 설정하고 있는가? 홍콩의 엠플러스(M+) 미술관에서 건축, 디자인 소장선은 현대미술 소장선과 어떤 상호 조응과 길항의 역학을 창출하게 될 것인가? 서울시립미술관은 건축, 디자인, 공예 소장선을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가? 한국이나 아시아의 미술관이 건축, 디자인, 공예 소장선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산업 시대의 기계 미학, 컴퓨팅 시대의 정보 미학, 스마트기술 시대의 AI 미학은 어떻게 방증될 수 있는가? 건축, 디자인, 공예 소장선을 통해 방증되는 산업 시대의 기계 미학, 컴퓨팅 시대의 정보 미학, 스마트기술 시대의 AI 미학은 다시 현대미술 소장선에서 어떻게 재발견될 것인가?

임근준, <스케치: 한국현대미술의 다이어그램(미완성)>(2020~) © 임근준

만약 모마를 중심으로 한 북미의 과학기술주의적 역사관을 아예 부정하기로 한다면 건축, 디자인, 공예 소장선을 구축할 때 그 역사는 현대미술 소장선이 그려내는 역사와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할까? 한데, 이를 기각한다는 것은 실재하는 자신의 역사마저 부정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한국의 주요 미술관들이 따르고 있는 역사관을 창출한 이경성도 현대미술, 공예, 건축의 타임라인을 하나로 중첩해 고찰하는 과정을 통해 진보하는 탈식민 모더니즘의 동역학을 제시해 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국립현대미술관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이경성이다. 고유섭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 미술사학자로서의 꿈을 키운 그였으니,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신적 뿌리는 개성부립박물관장이었던 고유섭에게 가닿는 셈이기도 하다. 한데,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체제하에서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의 자문위원직을 맡았던 이경성은 이른바 군사정부 시절의 국가 재건 열망과 친일 청산 정신에 부합하는 세계관으로 한국 현대미술계의 주류 권력을 조형한 인물이기도 하다. 정식으로 관장직에 오른 것은 1982년의 일이지만, 그 이전에도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립과 운영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9대, 11대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이경성은 1952년 개관한 일본의 도쿄 국립 근대미술관(東京国立近代美術館)에 자극을 받아 1955년 일찍이 국립근대미술관의 설치를 촉구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경성에게 일본의 국공립 미술관 제도를 면밀히 연구할 기회는 없었던 듯하고, 따라서 그가 국립현대미술관에 끼친 영향은 대체로 운영 방식 쪽보다는 역사 인식 쪽에서 더 명확히 찾을 수 있다. (이경성은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지냈고, 또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의 창설을 준비한 바 있으므로, 박물관 시스템에 대한 이해는 명확했을 것이다.) 그가 시기별 주요 저작을 통해 아주 분명하게 역사 인식을 업데이트했다는 사실은 퍽 흥미롭다.25

1959년의 저술 「한국 회화의 근대적 과정」에서 이경성은 1910~1919년 시기를 “왜곡된 근대의 한국 회화”로 1920~1945년 시기를 “불행한 연대의 한국 회화”로 칭했다. 1959년이면 반국전 운동의 흐름에 따라 독립 예술가 그룹들이 나타난 1957년에서 불과 2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으므로, 모더니즘의 승리를 점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데, 이경성은 1964년의 저술 「한국 건축의 근대적 과정」에서 개화기에서 1910년까지를 “한국 근대 건축의 여명”으로 호명하며 독자적 발전 가능성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1910~1945년 시기를 “왜곡된 근대 건축”으로, 1945년 이후를 “국제주의 건축 및 기능주의의 도입”으로 규정했다. (도쿄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더욱 진전된 모더니스트의 역사관을 제시했던 것. 따라서, 1968년의 저술 「한국근대미술 60년의 문제들」에서 이경성은 지난 10년간 시도된 앵포르멜 등 현대미술 운동을 바탕으로 새로운 얼개를 제시하는 자신감을 드러낸다. 1910~1919년 시기를 “태동기”로, 1920~1936년 시기를 “모색기”로, 1967~1945년 시기를 “암흑기”로, 1946~1951년 시기를 “혼란기”로, 1952~1956년 시기를 “전환기”로, 그리고 1957년 이후를 “정착기”로 규명했다. 이러한 발전론적인 세계관, 전후 모더니즘 중심의 세계관은 1970년의 저작 「한국 조각의 근대적 과정」과 1972년의 저작 「한국 공예의 근대적 과정」에서도 거의 그대로 유지됐다. 한데, 1972년 유신 독재 체제가 출범하고 나자, 이경성은 자신의 역사관을 가치 중립적 언표 뒤로 숨기는 정치적 감각을 발휘한다. 1973년의 저술 「한국근대미술사 서설」에서 그는 개화기부터 1910년 한일 병합까지를 “근대1기”로, 1910~1945년을 “근대 2기”로, 1946년부터 오늘까지를 “현대1기”로 규정했던 것이다.

모더니즘의 승리를 전제로 한 이러한 임의적 역사 분류 체제는, 지금까지도 국립현대미술관과 미술사학계에 관습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유신 독재 시대의 과도기적 세계관이 주류가 됨에 따라, 개항기부터 1945년까지의 미술 활동을 다루는 근대미술사학 연구자들과 1945년 이후의 현대미술 활동을 다루는 현대미술사학 연구자들은 서로 소통하는 일이 드물게 됐고, 또 이후 통사로서의 한국 미술사나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작성하는 인물은 나타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허나, 이를 이경성의 잘못이라고 지적할 수는 없겠으니, 과도기적 역사 인식을 적절히 극복하지 못한 이후 세대의 무능을 탓하는 것이 더 마땅하겠다. 특히 연구자들마저 간과해 온 점이 ‘전통의 재해석을 바탕으로 한 전후 모더니즘의 승리’를 통해 식민기 미술의 한계와 북조선 사회주의 미술과의 경쟁 구도를 극복하는 이경성 특유의 모더니스트 역사관이 회화, 조각의 역사와 건축, 공예의 역사를 중첩해 사고하는 과정에서 창출됐다는 사실이다. (식민기에 유물론적 사관을 미술사에 적용해 다시 일본 식민주의자들의 논리와 유사한 서사를 창출해 비판받았던 이여성이나, 서화 전통을 바탕으로 민족적 모더니즘을 상상했던 김용준의 사례 등은 이경성의 사고에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터.) 하면, 2020년대의 시점에서 이경성의 역사관을 해체 및 재구성하려면, 역시 2020년대의 시점에서 회화, 조각의 역사와 건축, 디자인, 공예의 역사를 중첩해 연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게 아닐까?

과천관 설립을 추진한 김세중 제10대 관장이 과업 추진 중 세상을 뜨고, 이경성이 과천의 초대 관장으로 취임하게 됐지만, 건립백서 등을 보면, 이상적 직제 구조를 제시하는 등 큰 기여를 한 인물은 김세중 작가라는 지적도 존재한다. 따라서, 이경성 관장이 1987년, 즉 과천관 초기에 국립현대미술관의 영문 이름을 누군가의 조언에 따라 ‘Museum of Contemporary Art’로 정해버릴 때, 다소 숙고가 부족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1987년 이후 동시대성 추구에 방점이 찍히면서, 근대미술 연구와 소장선 구축에 소홀하게 됐다는 것이 중평이다. (영문 명칭은 2013년 정형민 관장 시절 뮤지엄 아이덴티티 교체 때 ‘Museum of Modern & Contemporary Art’로 바뀌었다. 반면 서울시립미술관의 영문 명칭은 ‘Seoul Museum of Art’인데, 김홍희 관장 시절 ‘세마(SeMA)’라는 약칭을 병용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국립현대미술관의 후임 관장들이나, 서울시립미술관 이후 등장한 지자체 설립 현대미술관들의 관장들은 이경성 시대에 마련된 역사관을 업데이트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민중미술 운동의 기반을 조형해 낸 임영방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제12대 관장으로 취임해 한국 현대미술계에 동시대성의 개념을 소개하기 시작했으나, 체계적 조직 개혁은 적절히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임영방 관장은 외부 인사들을 활용해 대형 전시를 추진하면서 학예실 기능은 더 등한시한 면도 없지 않았다.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관으로 일하기 시작해 1993년 학예실장이 됐던 박래경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학예관과 학예실장이 4급이고, 그 아래의 학예사들이 6급이었으나, 임영방 관장 시기에 학예관 임명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소장품 정책도 수립되지 않아서 작품 수집은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졌다.26

이후 최만린 관장을 거쳐 오광수 관장이 미술관을 이끌면서, 이경성 시대의 역사 인식틀과 운영 모델은 극복되지 않고, 기본 틀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민중미술계를 대표하는 김윤수 관장이 취임했을 때, 적어도 새로운 역사적 얼개가 제시되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작품 구매 스캔들로 인한 불명예 퇴임이었다. 배순훈 관장은 서울관 신축에 걸맞은 CEO형 수장이었으니, 법인화 추진 외로 미술사 인식의 업데이트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미술사학자인 정형민 관장은 관별 특성화 사업을 진행해 성과를 거뒀고, 근대 미술사 연구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뵀다. 그러나 역시 채용 비리 논란으로 불명예 퇴진. 제19대 관장이었던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Bartomeu Marí i Ribas)는 외국인이라 한국의 근현대 역사와 미술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또 언어 문제로 조직을 장악하지도 못해 허수아비 관장으로 임기를 마치고 말았다.

결국, 2020년 설립 51주년을 맞는 오늘에도, 이경성 시대의 역사 인식틀과 운영 모델은 고스란히 남아 있게 됐다. 눈부신 외형적 성장과 달리, 소장선 구축 계획에 역사적 방향성을 설정할 컨센서스는 부재하는 상태고, 각 분과별 상호 조응에 대한 이해도 거의 부재하는 상태다. 즉, 정신적 성장은 심히 지체됐다고 평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모더니즘 미술과 신형상 미술, 민중미술의 상충을 발전적으로 통합해 서사화하는 통합적 세계관의 부재다. 한국 사회에 국제화(친외세) 지향의 산업화 서사와 반외세(반국제화) 지향의 민주화 서사를 통합 제시하는 미래 지향적 정치 세력이 없듯이, 현대미술계에도 둘을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세력이 없다.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 등 지역의 시도 미술관이 국제화 지향의 앙포르멜, 단색화 미술, 그리고 반외세, 반전지구화 지향의 민중미술, 포스트 민중미술의 대결 및 경쟁 구도를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을 추동해 온 동역학의 기본으로 인정하고 상호 인정의 대서사를 제시한다면, 이는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잖을 것이다.

‘서울시립미술관 미술사 연표’ (2016) Ⓒ 서울시립미술관. [ 같은 자료 ‘세마코랄>캐비닛’에서 다운로드하기]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의 미술사 연구자들은, 근대미술사, 전후 현대미술사, 민중미술 운동사, 컨템포러리 아트의 역사를 각각 분리해서 연구하려는, 강한 영역 의식을 드러내곤 한다. 하지만 그건 미래지향적 태도가 아니다. 한국의 국공립 미술관들은 김규진, 오세창, 고희동 등의 개척자 세대를 연구해 전시를 열어야 한다. 친일파 논란이 두려워 식민 세대 일부 작가들의 연구와 전시를 기피하는 것도 책임 방기에 불과하다. 역사 연구의 빈칸을 메워 나가야 미래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다. 친일 행적을 명확히 적시하며 전시하는 성숙한 풍토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국가적 범주 안으로만 통합을 시도해 봐야 한계는 명확하다. 2020년대엔 아시아 권역에서의 상호 교차성과 국제성이 문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하면, 비판적 모더니티와 동시대성의 성립을 설명하는 한국, 일본, 중국, 타이완, 홍콩,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각기 다른 방식을 비교해 봐야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아시아 리얼리즘》전(2010)을 공동 기획 및 주최했던 능력을 바탕으로 《아시아 모더니즘》전과 《아시아 당대미술》전을 추진해야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할 수 없다면, 서울시립미술관 등 여타 미술관들이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중장기적으로 볼 때, 국내의 국공립 미술관들은 범아시아를 포괄하는 미래지향적 미술관으로 거듭나야 한다. 홍콩의 엠플러스 미술관이 2021년 말 개관을 선언했지만, 범아시아의 젊은 작가들을 포괄하는 연례 혹은 격년제 기획전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 등 지역의 시도 미술관에도 그에 부합하는 새로운 프로그램과 연구와 서사 체제가 필요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국내 국공립 현대미술관의 한국 현대미술 소장선과 그를 통해 그려내는 한국 현대미술사는 한국이라는 국가주의를 기각하고, 현대라는 구미의 가치 평가 기준을 재설정함으로써, 미술의 가능성을 리셋하고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역의 소규모 미술관들이 소장선 구축 기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소장선의 지향점은 지역 미술의 역사를 맵핑 아웃하는 동시에 그를 통해 국가주의, 지역주의의 대서사에서 탈궤해야 한다는 2중의 목표에 놓여야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이 1930년대에 제시된 앨프레드 바 주니어의 대계에 맞춰 유럽의 모더니즘을 집어 삼킨 과정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미술 전공자를 구미로 ‘유학’ 보내고, 현지에서 인정을 받은 사람을 다시 수입해 토착화 작업을 요구하고, 토착화에 성공하면 대학 교수로 뽑아 제자를 양성하게끔 한다’는 식의 패턴으로는 결코 구미 미술관계 중심의 헤게모니를 뛰어넘을 수 없다. 몇 십 년만 지나도, ‘변방의 모방적 근현대미술’로 만족하는 사람은 국내에서도 국외에서도 찾기 어려울 터. 힘과 지혜를 모아 더 나은 미래를 과감히 실현할 때다.

추신 1)
1990년대 전 지구화의 바람이 일었을 때, 동남아시아의 현대미술인들은 한국과 일본의 현대미술관들을 보며, 왜 뉴욕 현대미술관처럼 미술사를 총괄하려는 불가능한 목표를 세워 놓고 자괴감에 시달리느냐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비판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 국내 작가들의 현대미술 소장선으로 지역 버전의 모더니즘 서사를 구축하고자 할 때 나타나는 모순점들, 즉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축소하고 지역 모더니즘 전개의 내적 자율성과 완결성을 위조해 내는 경향 등을 거론했다. 둘째, 국제화, 전 지구화의 흐름에 부합해 보고자 국외 작가들의 현대미술 소장선을 구축해 갈 때, 독자적 관점에서 유럽, 북미 미술사를 작성할 수도 없고, 아시아 등 탈식민 지역의 미술사를 총괄할 수도 없다는 것. 셋째, 국내 미술사 소장선과 국외 미술사 소장선의 조화와 종합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따라서 동남아시아의 현대미술관들은 현실적 판단을 취해 소장선 없는 기획전 공간을 추구하거나, 지역의 대표 작가들의 작품만을 소장한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 결과는 좋지 않아 뵌다. 구멍 난 소장선마저 갖지 못한 상태의 지속으로 인해, 역사와 역사적 얼개의 문제점을 이야기할 능력을 아예 잃고 말았다. 반면에, 한국의 국공립 미술관을 보면, 곳곳에 허점으로 가득한 소장선이라고 해도, 비어있는 부분을 통해 비평적 문제 의식을 일으킬 수 있고, 또 주먹구구식으로 모은 소장선으로부터 얼마든지 다층적 시대상과 시대 의식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즉, 역사적 관점을 임베드(embed)하기만 했다면, 그 역사적 의식의 한계와 무관하게 소장선을 갖춘 편이 없는 쪽보다는 몇 배 낫다고 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하위 상대로서 자신을 규정하게 되는 지역 미술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역 미술사’라는 카테고리의 한계와 모순을 핑계로 삼기보다는 한계와 모순을 긍정하는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 지역의 주요 미술 작품을 수집하고, 그와 동시에 상위 상대의 역사에 대응하는 지역 외의 미술 작품들도 수용하고자 노력하는 것, 그것이 현재로선 최선의 길이다. 더 나아가 해당 지역의 미술 기관이 전시 기획, 소장선 구축, 교육 활동 등을 통해 서울 미술계(혹은 아시아 미술계)와 지역 미술계 사이의 기우뚱한 균형과 길항의 관계를 심화 및 발전시킬 수만 있다면, 그것은 최선 이상의 성과가 될 것이다. (국내의 경우, 예외적으로 대구 미술계는 서울 미술계(동아시아 미술계)와의 관계 속에서 기우뚱한 균형과 길항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해 왔다.)

추신 2)
지자체 미술관들이 소장 기능을 강화하고자 할 때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술은행 공모제와 유사한 제도를 도입하고, 그를 기회 삼아 미술관 소장품 구입을 내부 학예실의 추천과 심사로만 진행하자는 의견이 나오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미술은행 공모제란, 언젠가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는 제도다. 그건 네덜란드의 사례를 보면 명확히 예측 가능하다.

2013년 서울문화재단의 초청으로 서울을 찾았던 네덜란드 글로닝언 대학교(University of Groningen) 교수 파스칼 길랭(Pascal Gielen)의 증언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네덜란드 문화 정책은 늘 국제적인 관심을 끌어 왔다. 2011년 예산을 무려 26%나 삭감하겠다는 중앙 정부의 공식 발표가 세계의 이목을 끈 유일한 사례는 아니었다. 과거에, 문화 분야에 대한 긍정적인 정책 규정은 다른 국가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1949년에 시행되어 1987년까지 지속되었던 시각예술규정(BKR: Beeldende Kunstenaars Regeling, Visual Artists Subsidy Scheme)은 세계 문화계에서도 유명했다. 네덜란드인이 아니라면, 예술가들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부의 수입을 향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1982년에 3,377명의 시각 예술가들이 이 사회 보장 제도의 혜택으로 총 125만 유로에 달하는 지원금을 받았다. 지금은 폐지된 이 규정은 현재 문화 분야에서 200만 유로 가량의 예산이 감축된 사실과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가 극과 극의 나라로 비춰지는 것 같다. 추는 중간에 머물지 않고 종의 양끝을 오간다. 네덜란드 문화계는 최근까지 넉넉한 예산을 할당 받아 다른 나라의 질투어린 시선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네덜란드의 문화 예술 분야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면 동정 어린 시선을 받게 된다.27

1949년부터 1987년까지 약 38년간 운영됐던 시각예술규정(BKR)은 미술가의 작품을 국가가 구매해 주는, 국내의 미술은행과 퍽 유사한 미술인 복지 제도였다. 수많은 작품이 창고에 쌓이게 되자 미술품 대여 제도를 추가했지만, 태작을 사무실에 걸고 싶어 하는 공무원은 많지 않았다. 제도는 폐지됐지만, 항온항습 기능을 갖춘 스헤르토헨보스(’s-Hertogenbosch) 소재의 거대한 창고엔 아무도 원하지 않는 3류 미술품들이 한가득 수장돼 있다. (수장된 작품의 수는 무려 300,000점 이상이었다.) 이런 부조화를 두고, 영국의 미술사학자 앤드류 그레이엄-딕슨(Andrew Graham-Dixon)은 “네덜란드에선 소장선보다 미술관 건축이 훌륭하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2007년 유로화 경제권에 위기감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 네덜란드 정부의 인내력은 한계에 달했다. 소장선을 팔아 창고를 비우고 유지비 부담을 털어내기로 한 것. 아무리 질 낮은 소장선이라고 해도 정부 소장선이 매각 처분된다는 것은 유럽 미술관계에 충격을 던졌다. 매각 방식도 놀라웠다. 네덜란드 과학문화교육부 산하 문화유산 에이전시(Cultural Heritage Agency of the Netherlands)는 시각예술규정 소장선 일부를 이베이(eBay)를 통해 판매했다. 팔아야 할 작품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보니 이베이를 통한 온라인 경매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호가는 1유로부터.28 네덜란드 사회 특유의 실용주의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적잖은 가격에 매입한 미술품이 헐값에 매각되는 풍경은 미술인들을 다소 침울하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네덜란드 문화부는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진행된 573점의 소장선 매각으로 25,000유로의 수익을 올렸는데, 매각 추진 과정에서 소요된 예산이 31,000유로라서 6,000유로의 적자 운영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장기적으로 창고 운영에 소모되는 비용에 비하면 낫다는 것. (하지만 소장선이 하도 많아서 이런 속도라면 창고를 다 비우기 어려울 전망이다.) 시각예술규정의 소장선 매각은 OODE갤러리(젊은 디자이너들의 작품과 소장선에서 불용 처리된 작품들을 판매)를 통해서도 이뤄지고 있다. OODE갤러리의 매물 가운데 불용 처리 미술품들은 2012년 설립된 비영리단체 폐적 굿즈 재단(Stichting Onterfd Goed, Foundation of Disinherited Goods)을 통해 제공된 것들인데, 폐적 굿즈 재단은 매물을 1차로 추리는 일을 하고 있다. 시각예술규정 소장선 말고도, 재정 지원이 끊긴 몇몇 지자체 미술관의 소장선을 해체했다. 위트레흐트 시 미술품 소장선 5,000점을 불용 처리해 해체할 때는, 소장선에서 900명의 작가들을 추적해 본인의 작품을 되사겠냐고 연락 및 문의했지만, 600명 정도가 답신했음에도 겨우 10명만이 작품을 되찾아갔다고 한다.29

추신 3)
모마 특유의 기술 진화론적 미술사관의 바탕이 되는 기술 형태론의 약점 혹은 허점은 무엇일까? 알고리즘적 질서에 맞춰 패턴화하는 기술 형태들의 공회전 세계를 현대미술계는 간과하고 있다. (그 때문에 현대미술은 예술가의 자율성 신화로 포장한 미술 시장의 질서 속에서 급속히 장식미술화해 왔다.) 다음은 라슬로 모호이 나지(László Moholy-Nagy, 1895~1946)에게 영감을 줬던, 헝가리의 생물학자 겸 신지학자(theosopher) 라울 프랑세(Raoul Francé, 1874~1943)의 주장을 2020년 오늘의 상황에 맞게 업데이트한 문장들이다.

그것이 구체적 사물이든 사유든, 모든 유기적 체계의 존재에는 그 존재의 본성에 상응하는 개요적 형태(abstract form)가 따르기 마련이다. 개요적 형태의 특정적 발현태(specific figure of manifestation)는 제각각일 수 있지만, 개요는 관철된다.

모든 유기적 과정(process)에는 필연적으로 변화의 근본적인 패턴 형이 내재해 있다. 모든 사건(event)에는 자신의 필연적인 패턴과 형태가 있다.

각 과정은 단계에 걸맞은 자신만의 기술적(technical) 형태를 산출하는 경향을 띤다. 모든 에너지는 물리적 조건에 맞춰 에너지의 패턴 형을 산출한다.

모양(shape)은 활동(activity)으로부터 유추되고, 형태(form)는 유기체(organism)의 목적으로부터 유추된다는 주장에 수긍한다면, 형태가 모양보다 본질적이라는 데 동의하는 셈이다.

모든 자연적인 구조는 결정화된 것처럼 뵈는 유동적 과정의 한 단계를 제시한다. 따라서 모든 자연적 구조에는 거시적 시점의 동세가 임베드돼 있다.

기술 변동을 의사 유기적 체계로 사고할 때, 기술 체제의 본성에 상응하는 개요적 형태를 유추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기술적 진화 과정(process)에는 필연적으로 변화의 근본적인 패턴 형이 내재해 있다. 모든 기술사적 사건(event)에도 자신의 필연적인 패턴과 형태가 있다.

과학 기술의 전개 방향에 부합하는 기능적 사물의 형태를 찾는 일과 기능적 사물의 사용 활동에 부합하는 모양을 찾는 일은 교집합을 갖는다.

모든 과학 기술적 구조는 결정화된 것처럼 뵈는 유동적 과정의 한 단계를 제시한다. 따라서 모든 과학 기술적 구조에는 거시적 시점의 동세가 임베드돼 있다.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 보자. 필립 존슨이 말한 ‘다른 힘’은 21세기 오늘의 상황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유통과 소비에 최적화한 형태들이 그려 내는 공회전과 진화는 오늘의 현대미술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공회전을 통한 느린 진화라는 ‘다른 힘’도 모더니즘들의 현대미술에 핵심이 되는가?

오늘의 현대미술가들이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통해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혹은 기지기식(旣知旣識)간에) 취하게 되는 ‘다른 힘’은 그들의 작품과 전시에서 어떤 열린 질문의 계정을 (반)자동 형성하고 있는가?

*본고는 2020년 7월 24~25일 서울시립미술관이 개최한 SeMA Agenda 2020 ‘수집’ 〈소유에서 공유로, 유물에서 비트로〉 심포지엄 발표문을 각색 및 재편집한 원고입니다.


  1.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교(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의 인류학 박물관(Museum of Anthropology)이 1970년대에 기사화된 수장고를 가장 먼저 구현하기 시작했다고들 하는데, 역시 동기는 인류학 소장선에서 인종주의적 색채를 지우고 민주주의적 세계관을 구현하는 데 있었다. 그 다음 사례로는 미국 로체스터의 스트롱 국립 놀이 박물관(The Strong National Museum of Play)이 1982년에 개방형 수장고를 시도한 일이 꼽힌다. 주요 박물관으로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이 1988년 헨리 루스 미국 미술 연구소(Henry R. Luce Center for the Study of American Art)를 개관할 때 개방형 투명 수장고를 가장 먼저 도입했다. 

  2.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은, 스미소니언 미술관(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의 루스 재단 센터(Luce Foundation Center), 빅토리아 & 앨버트 뮤지엄(Victoria & Albert Museum)의 도자 갤러리(Ceramic Gallery), 루브르 랑스(Musee du Louvre-Lens)의 개방형 수장고, 샤울라거(Schaulager) 등을 복합 참조한 결과다. 2020년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의 파주 개방형 수장고 및 정보 센터가 개관을 준비 중이다. 

  3. 2014년 12월 개관한 리옹 융합 박물관(Musée des Confluences)은 자연사 박물관 등 기존 포맷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옛 기메 자연사 박물관 컬렉션 등을 흡수해 과학 박물관/센터와 인류학 박물관의 기능을 융합 구현해 놓았다.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 산책하며 인류와 문명의 존재 의의를 묻고 생각한다는 콘셉트의 원점 회귀형 박물관, 즉 21세기 버전의 ‘경이의 방’이다. 기존의 개방형 수장고에 비해 훨씬 더 파격적인 시도다. 건축은 해체주의 건축으로 주목받았던 쿱 힘멜블라우(Coop Himmelb (l) au)가 맡았다. (쿱 힘멜블라우가 설계해 2011년 개관한 부산 영화의전당2011년 개관은 리옹 융합 박물관의 중간 스케치에 바탕을 둔 결과물이다.) 

  4.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등에 의해 추동된 인상파 미술이나, 1905년 제21회 《독립 미술가 살롱》전, 1905년의 제3회 《살롱 도톤》전 등을 통해 신주류로 부상했던 야수주의 미술 등은 프랑스 파리에서 전개됐지만, 당시 프랑스인들은 현대미술관을 설립해 새로운 현대미술의 역사를 작성할 야심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러한 인식은 양차대전 사이에도 유지됐다. 전후 프랑스 미술계에서 나치 부역자와 비시 정권 부역자들은 발언권을 상실했으므로, 주도권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이하 장 뒤뷔페(Jean Dubuffet), 피에르 마티스(Pierre Matisse) 등 친미파에게 넘어갔고, 프랑스 중심의 미술사는 작성되지 못했다. 

  5. 바 주니어는 해당 다이어그램을 통해 ‘기계 미학(Machine Esthetic)’이라는 버내큘러 요소가, 1910년대의 미래파와 절대주의, 러시아 구축주의와 네덜란드의 데스테일,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și)와 파리의 순수주의, 1919년 출범한 바우하우스와 1920년대의 현대 건축, 그리고 1930년대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에 두루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분석 및 제시했다. 

  6. 평문 「아방가르드와 키치」(1937)를 읽은 미국 미술인이 1939년 뉴욕 월드 페어(‘과학의 발전과 그에 힘입은 기술 혁명을 통해 머잖아 인류는 계급 혁명을 거치지 않고도 유토피아에 도달하게 된다’는 비전을 제시해 낸)를 관람했다면, 그(녀)는 어떤 비평적 시각으로 미국의 오늘과 미래상을 바라보게 됐을까? 

  7. 뉴욕 모마 학예실의 건축부는 1932년 설립돼 1949년까지 지속됐고, 부장직은 필립 존슨이 처음 맡아, 이후 필립 굿윈(Philip L. Goodwin, 직함은 ‘체어맨’), 재닛 헨리치(Janet Henrich, 직함은 ‘디렉터’), 엘리자베스 모크(Elizabeth B. Mock, 직함은 ‘디렉터’)로 이어졌다. 산업 디자인부는 1940년 신설돼 1948년까지 유지됐다. 부장직은 엘리엇 노예스(Eliot F. Noyes)로 시작해 에드가 카우프먼 주니어(Edgar Kaufmann, Jr.)로 이어졌다. 이 두 분과가 ‘건축 및 디자인’부로 병합된 것은 1949년의 일이고, 지금까지 그 편제가 이어지고 있다. 1949년 병합 재출범 당시 초대 부장은 필립 존슨. 2015년 3월부터 모마 학예실의 건축 및 디자인부를 이끌고 있는 큐레이터 마르티노 슈티에를리(Martino Stierli)는 제6대 부장이다. 

  8. 《기계 예술》전 이후, 뉴욕 모마에서 그 유산을 이어받은 첫 전시 프로그램은 1938년부터 1949년까지 9년 동안 연례전의 형태로 지속된 《유용한 사물들 Useful Objects》전 시리즈였다. 그리고 다시 이를 이어받은 게, 1950년부터 1955년까지 다섯 차례 개최된 《굿 디자인 Good Design》전이었다. 하지만 이 전시들은 시중에서 실제로 구매할 수 있는 훌륭한 디자인 제품들을 주로 제시 및 전시함으로써 미국인들의 취향과 실생활의 현대화를 이끌어낸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따라서 ‘디자이너에 의해 디자인되지 않은 굿 디자인’을 주로 전시한 《기계 예술》전과는 성격이 사뭇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모마에서 ‘굿 디자인’이라는 진화의 규준을 제시한 장본인은 건축사학자, 큐레이터, 자선 사업가였던 에드가 카우프먼 주니어(1910~1989)였다. 미국 피츠버그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유대계 사업가 에드가 카우프먼(Edgar J. Kaufmann, 1885~1955)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40년 뉴욕 모마의 초대 관장 앨프레드 바 주니어에게 가정 용품의 디자인을 겨루는 경연 대회의 주최를 제안하는 편지를 써서 실현한 바 있는 인물로, 1938년부터 모마의 자문으로, 1939년부터 동 미술관 건축위원회의 일원으로 일했으며, 1940년엔 모마 학예실의 정식 큐레이터로 발탁됐다. 1942년부터 약 4년간 공군으로 복무한 뒤 무사히 제대한 그는 학예 조직에 귀환한 직후인 1946년 7월 산업디자인부의 제2대 디렉터로 발탁돼 크게 활약했다. (전술했듯, 1940년 출범한 모마의 산업디자인부는 1949년 건축부와 통합됐고 초대 부장은 필립 존슨이 차지했다. 이후 카우프먼은 1955년까지 ‘굿 디자인 디렉터(Director of Good Design)’라는 다소 애매한 직함을 달고 큐레이터 업무를 봤다.) 

  9. 1943년 관장에서 밀려난 뒤, 주로 소장선 구축과 마티스, 피카소 등의 전시에만 관여했던 바 주니어는 1946년 개정판 도록 『피카소: 그의 예술 50년 Picasso: Fifty years of His Art』으로 박사 학위를 얻었다. 하지만 그가 마티스와 야수파를 저평가한 것만은 아니었다. 바 주니어가 1951년 발간한 『마티스: 그의 예술과 대중 Matisse: His Art and his Public』은 작가 연구의 규준이 되는 금자탑으로 칭송됐다.  

  10. 하지만 모마는 이 작품의 구매에 나서지 않았다. 의뢰자이자 소장자였던 페기 구겐하임도 이 작품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도 처음엔 이 작품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고, 과도기적 작품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1947년 이후 말을 바꿨다. 보자마자, ‘그래, 저게 위대한 미술이지(Now that’s great art)’라고 생각했었다나?) 사실 페기 구겐하임은 해당 작품을 몇 년 동안만 소장했을 따름으로, 1947년 베네치아로 돌아갈 때 작품을 가져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둘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1947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대형 현대 회화》전에 전시됐던 작품은 이후 예일 대학교에 무상 대여됐다. 작품을 처분하기로 작정한 소장자는 1948년 10월 3일 아이오와 대학교(The University of Iowa)에 편지를 써서 “운송비만 부담한다면, 작품을 기증하겠다”고 제안했고, 결국 1951년 10월 작품은 아이오와에 도착했다. 

  11. 원문은 다음과 같다. “Big pictures at their best are assertions of the artist’s self-confidence and esthetic conviction, affirmations of his belief in the importance of painting itself. … The exhibition is intended to show some of the functions which large scale paintings may fill, some of the styles in which they have been painted, some of the kinds of experiences or subjects which they incorporate. The open vistas of the installations have therefore the double value of isolating over half the paintings in the exhibition, yet permitting across-wall play of assertions between similar and opposite paintings.” 

  12. 1958년 4월 15일 미술관 2층에서 발생한 화재로 소장선 가운데 3점의 주요 미술품이 소실됐다. 하나는 잭슨 폴록의 〈넘버 1, 1948 Number 1, 1948〉이었고, 나머지 둘은 가로 길이가 5.5미터(18 foot) 정도 되는 모네의 수련 그림 2점이었다(현재의 모네 수련 소장품은 화재 직후 대체품으로서 구매했다). 화재는 에어컨을 설치하는 일꾼들이 페인트통, 톱밥, 캔버스 재질의 페인트 가림막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시작됐다. 이 불로 노동자 1명이 숨지고 소방관 여러 명이 연기를 흡입해 치료를 받았다. 적어도 25명이 다쳤다. 공사를 위해 2층의 그림들 대다수가 옮겨진 상태였지만, 모네의 작품을 비롯한 대형 그림들은 전시장에 그대로 남겨둔 상태였다. 3, 4층의 미술품들은 54번가 쪽 휘트니 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으로 소개됐다. 옮겨진 그림들 중에는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에서 대여해 온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도 있었다. (이때 《쇠라의 회화와 드로잉 Seurat Paintings and Drawings》전(모마 전시 번호 #629, 1958.3.24~4.15, 1958.5.1~5.11))이 진행 중이었다. 화재 당시 방문객과 직원들은 지붕으로 대피한 뒤 인접한 타운 하우스 지붕으로 뛰어내렸다. 이후 미술관 보수와 확장을 위한 대대적 모금 활동이 전개됐고, 손상을 입은 작품들의 수리 복원을 위해 새로운 수리 복원 연구소의 설립이 논의됐다. 진 볼크머(Jean Volkmer, 본디 1943년부터 모마에서 전시 디자인 관련 일을 했던 인물)를 소장으로 앞세운 모마의 보존 연구소는 1958년 출범했지만, 실제 독립된 연구소 시설이 갖춰진 때는 1960년이었다. 

  13. 바 주니어가 1943년 모마 관장직에서 밀려난 이후, 관장 자리는 1949년 르네 다농코트(Rene d’Harnoncourt)가 관장으로 선임될 때까지 공석이었다. 모마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킨 다농코트가 1968년 관장직에서 물러날 때, 바 주니어도 모마를 떠났다. 이후 관장에 오른 베이츠 라우리(Bates Lowry)는 1969년 딱 10개월만에 데이비드 로커펠러(David Rockefeller)에 의해 해고됐고, 1970년 관장이 된 존 브랜틀리 하이타워(John Brantley Hightower)는 역시 독선적으로 굴다가 1972년에 낙마했다. 즉, 1968년부터 1972년까지의 약 4년은 기관 운영 차원에선 위기의 시기였다. 제5대 관장이 된 이는 작가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의 동생 리처드 올덴버그(Richard Oldenburg)로, 사업가적 기질을 지닌 그는 1995년까지 23년간 모마를 이끌며 소위 블록버스터 전시들을 히트시켰고, 미술관을 문화 산업 시대에 부합하는 대형 기관으로 변모시켰다. 그 자리를 40세의 나이에 물려받은 인물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부합하는 모마를 창출해 낸 현 관장 글렌 라우리(Glenn D. Lowry)다. 2018년 65세 관장직 은퇴 규정을 없애며 7년짜리 계약 연장을 이뤄 낸 그는 2025년까지 모마를 이끌 예정이다. 2025년 은퇴한다면 무려 30년을 집권한 셈. 

  14. 참여 작가는 다음과 같았다. William Baziotes, James Brooks, Sam Francis, Arshile Gorky, Adolph Gottlieb, Philip Guston, Grace Hartigan, Franz Kline, Willem de Kooning, Robert Motherwell, Barnett Newman, Jackson Pollock, Mark Rothko, Theodoros Stamos, Clyfford Still, Bradley Walker Tomlln, and Jack Tworkov 

  15. 윌렘 드 쿠닝은 1948년 여름 거장 요제프 알버스(Josef Albers)의 초청으로 블랙마운틴 칼리지(Black Mountain College)에서 학생을 가르치면서부터 조금씩 존경받기 시작했다. 1950~1951년 양해 동안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 미대에도 출강했고, 또 1950년 5월 20일엔 28명의 동료 미술가들과 함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공개 항의 서한(“진일보한 미술”을 적대시한다는 비난을 담은)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래도 네덜란드에서 온 불법 이민자 화가의 위상은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전환점은 1953년 3월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Janis Gallery)에서 개인전을 개막했을 때였다. 당시 미국 현대미술계는 크게 술렁였다. 과감한 붓놀림으로 캔버스 화면에 폭력을 행사한 거처럼 뵈는 〈여인 Woman〉(1950~1953) 연작이 형상을 다룬 새로운 추상표현주의였던 탓이었다. 

  16. 원문은 다음과 같다. “Following a successful year-long tour in Europe, the exhibition called “The New American Painting” will be on view at the Museum of Modern Art, 11 West 53 Street, from May 28 through September 8. This is the first time that the Museum’s International Program has shown in New York one of its exhibitions which has traveled abroad. The exhibition is supplemented by a mural-size map illustrating the entire scope of the Museum’s exchange program which during the past seven years has included 461 showings of 60 exhibitions of painting and sculpture, architecture and design, prints, photographs and films in 51 countries.” 

  17. 원문은 다음과 같다. “Pioneering MoMA curator Dorothy Miller was renowned for her ability to scope out and promote innovative artistic talent, but even by her standards it was clear she had organized something extraordinary with 16 Americans. The 1959 exhibition was the fifth in the Americans series, which introduced exceptional contemporary American artists. In the accompanying catalogue, Miller mused that the show had an “unusually fresh, richly varied, vigorous, and youthful character.” The work on display was groundbreaking, even to the point of vexing some conservative critics, who dismissed as folly works such as Robert Rauschenberg’s Combine paintings, Jasper Johns’s flags and targets, and especially four nearly monochromatic black paintings by a 23-year-old Frank Stella. The chances Miller took paid rich dividends: while initially controversial, the work in this exhibition would set the stage for the eclecticism and experimentation of the decade to come and soon be established as iconic American art.”  

  18. 2017년 11월 13일 모마에서 개막했던 《생각하는 기계들 Thinking Machines: Art and Design in the Computer Age, 1959–1989》전은 학예실의 주류라고 보기 어려운 건축 및 디자인 분과의 큐레이터와 미디어 및 퍼포먼스 아트 분과의 큐레이터가 공동 기획한 전시였지만, 나름 《기계 시대의 끝에서 본 기계》전에 화답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포스트 인터넷 아트 이전의 역사를 정리하는 동시에, 기술적 사물의 진보를 포집해 내야 한다는 건축 및 디자인 분과의 과제를 해결하는 전시이기도 했는데, 어느 정도는 AI 시대의 스마트 오브제 전시였던 독일 비트라 디자인 미술관(Vitra Design Museum)의 《헬로, 로봇 Hello, Robot》(2017)에 대한 화답이기도 했다. 《생각하는 기계들》전에서 재평가한 작가는 뉴 미디어와 올드 미디어의 복합 및 재창안을 개척해 낸 베릴 코로(Beryl Korot)와 일본 공예의 감각으로 슈퍼 컴퓨터의 젠 디자인을 도출해 냈던 타미코 틸(Tamiko Thiel)이었다. 모마가 2015년 구매한 코로의 대표작 〈텍스트와 코멘터리 Text and Commentary〉(1976~1977)는 미디어의 복합 재창안이기도 했고, 또한 재평가된 아니 알버스(Anni Albers) 이래의 직조 작업의 계열에 속했다는 점에서 중요했는데, 역시 2019년의 재개관 때 375점의 하이라이트 가운데 하나로 제시됐다. 코로의 재평가는 2017년 ZKM에서 그가 주도했던 ‘래디컬 소프트웨어(Radical Software)’ 그룹의 회고전이 열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편, 타미코 틸이 디자인한 〈수퍼 컴퓨터 CM-2 Supercomputer CM-2〉(1987)는 바우하우스적 사고에 과학을 추가한 뉴 바우하우스의 경향(이 경우엔 기오르기 케페스(Gyorgy Kepes)가 연결자)에 일본식 젠 사상(서예가인 모친 미도리 코노 틸(Midori Kono Thiel)의 영향)이 뒤섞여, 새로운 차원의 사이버네틱 투명성을 구현해 내는 데 성공한 예외적 사례였다. 모마는 2016년 이 슈퍼 컴퓨터를 구매해 수리했다. 

  19.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의 큐레이터 키내스튼 맥샤인은 바 주니어 관장의 조언에 따라 1966년 뉴욕 대학교(New York University)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67~1968년 유대인 박물관(The Jewish Museum)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았다. 1968년 모마의 조학예사(associate curator) 자리로 옮겨 전설적인 《프로젝트 Projects》 시리즈를 시작했다. 《정보》전(1970) 등 기념비적인 전시를 기획하는 가운데, 1971년 전시 큐레이터(Curator of Exhibitions)로, 1984년 시니어 큐레이터(Senior Curator)로, 2001년 명예 학예실장(Acting Chief Curator)으로, 2003년 학예 위원(Chief Curator at Large)으로 직함을 바꿔가며 활동하다가, 2008년 은퇴했다.  

  20. 375점 가운데 한국계 혹은 한국인 작가의 작품은 3점이었다: 백남준 1점, 하종현 1점, 이우환 1점. 

  21. 9번가 여성화가들로 불렸던 5인 리 크래스너, 일레인 드 쿠닝(Elaine de Kooning), 그레이스 하티건, 조안 미첼, 헬렌 프랑켄탈러 가운데 뉴 모마의 소장선 얼개에서 제외된 이는 일레인 드 쿠닝 한 명이었다. 

  22. 405번 전시실에서 그레이스 하티건의 작품은 윌렘 드 쿠닝의 작품과 직접 대조를 이루도록 배치돼 특별히 더 눈길을 끌었다. 이유가 있다. 하티건은 모마의 큐레이터 프랭크 오하라의 지원을 받았고,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평론가로 알려진 도어 애쉬튼(Dore Ashton)의 평문으로 상찬받았지만, 1960년 뉴욕을 떠나면서 다소간 잊힌 상태가 됐고, 1970년대의 페미니즘 바람에도 불구하고 대가 취급은 끝까지 못 받았다. (상류층 출신인 조안 미첼이나 헬렌 프랑켄탈러와 달리 빈곤층 출신이라 보험 회사에서 일하며 작가 생활을 꾸린 투사였지만, 아이를 기르며 작가 생활을 병행한 점이 1970~1980년대의 페미니스트들에겐 그리 멋져 뵈지 않았던 것.) 미술사적으로 보면, 한스 호프만 부류의 구성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탓이기도 했다. (최욱경의 초기작은 그레이스 하티건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23. 게이였던 마크 토비는 전후 형식주의의 얼개에 부합하지 않아서 역사에서 잊히게 됐다고들 하지만, 1958년 미국인으론 두 번째로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회화 부문 대상(International Grand Prize)을 수상한 유명인사였다. 사후 그의 미술사적 위상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것은, 오히려 그가 상속인을 지정하지 않은 채 1976년 스위스 바젤에서 사망하면서 그의 유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또 2차 시장이 형성되지 않으면서 주요 수집가들의 소장선에 그의 작품이 포함되지 못한 탓이 더 컸다. 

  24. 당시 파이어 아일랜드는 게이 휴양지로 급성장하고 있었는데, 지역 주민들의 반감이 컸다. 지역민 청년 케네스 루치카(Kenneth L. Ruzicka)가 지프차로 오하라를 들이받은 것도 고의성이 짙었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친구들은 이의를 제기했지만, 지역 경찰의 지역민 감싸기 수사로 인해 과실치사로도 기소되지 않았다고 한다. 

  25. 목수현, 「전통과 현대의 다리를 놓다: 석남 이경성의 미술사 인식」,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0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1): 375–386. 

  26. 임영방 관장은 지기였던 백남준과 함께 전 지구화 시대에 부합하는 여러 변화를 이끌었다. 《93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을 열고,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을 설립하고, 광주비엔날레를 출범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무기상이었던 처남의 미사일 도입 비리 사건으로 체면을 잃은 그는 이혼과 함께 모든 공직에 물러나 조용히 미술사 연구에 몰두했다. 

  27. 파스칼 길랭, 「신자유주의 체제의 예술: 네덜란드 공공 예술지원 삭감에 관한 사회학적 분석」, 『제5회 서울시창작공간 국제 심포지엄. ‘제도의 팽창, 창의적 동기: 예술가 공적 지원의 쟁점’』 (서울문화재단, 2013) 

  28. 매물은 다음의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museumveiling.nl 

  29. 네덜란드의 소장선 불용 처리와 매각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의 기사를 요약했다. Nina Siegal, “Giving Artworks a Second Life”, New York Times, April 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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