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의 다른 장소로서, 임프린트

임경용
임경용은 2007년 소규모 출판사 미디어버스와 2010년 더 북 소사이어티를 구정연과 함께 공동으로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출판과 관련된 전시나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제록스 프로젝트》(백남준아트센터, 2015), 《예술가의 문서들: 예술,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협업》(공동기획, 국립현대미술관, 2016),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 《좋은 삶》(디렉토리얼 컬렉티브, 서울시립미술관, 2018) 등이 있다. 알레한드로 루도비코의 『포스트디지털 프린트: 1894년 이후 출판의 변화』(미디어버스, 2017)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신신
신해옥와 신동혁이 함께하는 스튜디오 신신은 매체의 구조를 집요하게 탐구하는 디자인 방법론으로 그래픽 디자인을 깊이 있게 확장해 왔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만나는 곳에서 재료들의 성질을 적재적소에 실험적 방식으로 구사하는 이들의 작업은 종종 그래픽 디자인의 전통적인 평면성을 3차원 공간으로 승화시킨다. 특히 종이, 인쇄 기법, 제본 방식, 후가공 등의 요소들을 해석해 한 권의 책으로 결합해 내는 이들의 솜씨는 독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국제 공모전에서 골든레터를 수상하며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신신의 작업 세계는 “구현의 단계에만 고립된 디자이너로서의 역할과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이미지 생산자”(이미지, 「그러나 오히려 하나의 장소로서」)라 할 수 있다.

“출판의 다른 장소로서 임프린트”라는 주제로 2022년 9월 30일 서울 옥인동에 자리한 서점 더북소사이어티에서, 출판사 미디어버스의 대표 임경용, 공동 운영자 구정연, 미디어버스의 임프린트 기획자들, 신신(신해옥, 신동혁), 이여로, 강덕구, 그리고 참관자 김진주가 모여 진행한 워크숍의 내용을 일부 정리해 전합니다.

디지털 플랫폼 연구자이자 암스테르담에 있는 네트워크문화연구소(Intitute of Network Cultures)의 설립자인 헤르트 로빙크(Geert Lovink)는 한 강의에서 “중요한 건 플랫폼을 탈플랫폼(deplatform)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플랫폼’의 한계에서 벗어나 논의를 확장하기 위해, 세마 코랄은 한 출판사의 실천에 귀 기울입니다. 인터넷, 디지털, 물자에 그 정의를 국한하지 않는다면, 출판은 지식의 오랜 플랫폼입니다. 또한, 한 출판사가 작은 여러 출판 활동을 품고 분화시키는 최근의 ‘임프린트(imprint)’는 또 다른 플랫폼으로서의 역할로 출판을 변화시킵니다. 탈플랫폼의 가능성은 플랫폼 제거가 아닌 공동의 변화와 모색에서 비롯됨을, 이어지는 전자출판에 관한 아이디어, 디자이너의 시점과 수행성, “방법으로서의 출판”에 관한 대화에서 확인해 보세요.


소규모의 증식으로, 임프린트

임경용(미디어버스 대표): 오늘은 규모의 문제에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임프린트라고 하면 보통 대형 출판사에서 장르나 분야별로 운영하는 하위 브랜드 같은 것일텐데요, 미디어버스는 1인 출판사이지만 3개의 임프린트 혹은 총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 신신(신해옥, 신동혁)이 운영하는 ‘화원’, 이여로 님이 기획하는 ‘콜론’, 강덕구 님이 기획하는 ‘약간의 논픽션’이 있어요. 이 중에 약간의 논픽션에서는 2023년 6월 경에 첫 번째 책이 나올 예정이고, 화원에서는 이미 총 4권의 책이 나왔고요, 콜론은 이제 두 번째 책을 곧 출간합니다.

저희는 두 가지 관점에서 임프린트에 접근하려고 합니다. 가장 큰 부분은 1인출판사가 가진 한계, 즉 주제의 편협함이나 기획 인력 부족 같은 문제를 외부 기획을 통해 보충하는 것이 있을 것이고요, 미디어버스가 가진 문제의식이나 방향성이 외부 기획자, 편집자 등을 통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증식될 수 있는 가능성 같은 것도 기대하는 부분입니다. 지금 말한 3개의 임프린트나 총서는 기획자의 성향이 다르고 비교적 성격이 명확해서 재미있는 것 같아요. 이러한 조건을 활용해서 하나의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영역에서 주제를 발전시키고 서로 다른 결과물을 내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아시아’라는 이슈에 대해 신신, 강덕구, 이여로가 각각 자신만의 해석을 출판 결과물로 내놓을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을 통해서 우리가 특정한 주제를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어떻게 사유하고 있는지, 그 그림을 그려볼 수도 있죠.

사실 저는 여러분들이 앞으로 어떤 책을 만들지에 대한 아주 희미한 그림 정도만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인쇄 전에 “이런 저런 책이 나옵니다.”라는 식의 피드백만 받은 경우도 있고요. 저는 이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떤 책은 좀 더 깊숙하게 개입을 해서 편집 과정에 참여를 하기도 합니다. 상황은 각각 다르지만, 외부 기획자, 편집자가 미디어버스의 임프린트를 통해서 ‘출판’을 한다는 것이 기본 전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임프린트를 통해 미디어버스가 하지 못했던 것도 한번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출판에 대한 전망 같은 것인데, 최근에 GPT-3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잖아요? 생성형 AI가 글과 책을 쓰는 시대가 왔는데 굉장히 흥미롭다고 생각했어요. 브루스터 케일(Brewster Kahle)이 고안했던 Archive.org1의 이상이 거대 IT기업을 통해 현실화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GPT에 대한 다양한 전망들이 있겠지만,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자면) 테크놀로지를 통해 인류의 유산을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활용하자는 그런 의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Archive.org가 인류가 만든 다양한 자료들을 인터넷 상에서 유통하고 공유하는 방식을 제안했지만, 대중적인 매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GPT는 전혀 그렇지 않죠.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과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 사이에 어떤 틈새 같은 것이 있다면 그걸 한번 찾아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전자책을 활용한 예술출판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종이라는 테크놀로지가 그 어떤 것보다 우월하고 책 형식에 있어서는 그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물론 여전히 상업적인 전자책은 그냥 책을 모니터에서 보는 정도에 그치고 있지만 전자책의 다음 비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지금도 공유에 있어서는 전자책이 종이책보다 급진적인 비전을 보여주고 있죠. 2023년은 힘들겠지만 이후에 여기 계신 분들과 함께 AI와 전자책 형식을 활용한 출판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물론 관심이 없으실 수도 있겠지만(웃음). 테크놀로지를 활용한다고 해서 전혀 미래적인 것은 아니고요, 오히려 과거에서 그러한 단서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쨌든 이것 역시 일종의 이상의 영역에 해당되죠. 그래서 이런 부분도 같이 공유하고 풀어낼 것이 있으면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임프린트가 독자를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많지는 않지만) 미디어버스 독자가 있을 수 있고, 화원이나 콜론이나 약간의 논픽션의 독자가 있거나 생길 수 있겠죠. 그 뒤에는 독자와 임프린트 사이에 관심사가 교차하는 유무형의 장소 같은 것이 생길 수도 있고요. 이것이 어떤 복수의 공동체로 발전될 수도 있을 거예요. 콜론의 적극적인 참여자가 약간의 논픽션의 관찰자가 되는 식으로요. 어떤 임프린트는 사라지고 새로운 임프린트가 생겨날 수도 있을 거고요.

사실 소규모의 증식이라고 이야기했을 때는, 이런 부분을 상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공존하면서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지, 계획이 있다면 함께 이야기해보고, 만약 특별한 계획이 없다면 그냥 서로의 생각을 들어보고 공유하는 자리로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권의 책이 나왔지만 서로 관심이 없어서 만나지 않았다기 보다, 이것에 대해서 굳이 얘기를 듣지 않아도 상관없었던 것에 가까워요. 물론 신뢰를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화원과 미디어버스: 디자이너 출판의 장소 – 신신

신신(신해옥): 일단 저희가 만들었던 책을 소개하는 자리라고 생각해서 간단한 자료를 준비했습니다. 처음 책을 만들게 되면서 ‘어떤 출판사를 통해서 책을 만들까’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2020년 11월에 제가 그 동안 진행했던 프로젝트를 갈무리해서 프로젝트 공간에서 선보일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과 연계해서 출판물 2가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전시장에서 계속 활용되는 책, 나머지는 많은 사람들과 저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그걸 바탕으로 또 다른 저자들을 초청해 한데 엮는 것으로서의 출판물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출판사와 함께 만들어볼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차라리 우리가 직접 출판해보면 어떨까’라는 결론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활동해오면서, 미디어버스와도 협업하며 책을 만들었지만, 이 책은 디자인 전문 출판사라기보다는 디자인 영역의 변두리, 즉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디자이너가 편집자적인 시점을 갖고 접근한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대표님께 제안을 드렸죠.

이건 저희가 화원에 대해 써본 짧은 소개글입니다.

“화원은 미디어버스 임프린트입니다. 화원은 디자인 방법론이 구조와 물성을 지닌 사물로 이어지는 디자인의 수행적 실천에 주목합니다. 화원의 첫 번째 총서인 Gathering Flowers는 『개별꽃』을 시작으로 언어와 이미지로 구조를 깁고 그를 연속된 페이지로 묶어냅니다.”

구정연 외 지음, 『개별꽃(Gathering Flowers)』(서울: 화원, 미디어버스, 2020)에 삽입된 책갈피. 제공: 신신.
구정연 외 지음, 『개별꽃(Gathering Flowers)』(서울: 화원, 미디어버스, 2020)에 삽입된 책갈피. 제공: 신신.

그리고 화원의 첫 번째 총서로 『개별꽃(Gathering Flowers)』을 펴냈습니다. 제가 끄적인 글-조각들을 시작으로 다른 분들과 함께 단행본의 형태로 엮었습니다. 이 책은 저와 김뉘연 저술가, 린다 판 되르선 디자이너(Linda van Deursen) 그리고 구정연 선생님의 글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책을 처음 시작하는 글 중 하나는 제가 그 동안 썼던 글-조각들과 자료 수집했던 것들을 한 데 모아서 하나의 타래를 만드는 식으로 썼습니다.

이 책은 실제 책뿐만 아니라 프로젝트와도 함께 연계했습니다. 공간에 놓인 책의 이미지가 책에 배치되기도 하고 공간에 텍스트가 있는 식이죠. 만들어진 책이 공간 안에서 어떻게 읽히는지 등을 실험해보는 프로젝트로 진행했습니다. 이때는 ‘『개별꽃』 공동의 읽기’라는 워크숍을 기획했는데, 실제 관람객들과 함께 텍스트를 읽고 마음에 드는 영역들을 다시 발췌 후 낭독해서 이를 녹음하고 그 결과를 카세트 테이프로 얻는 퍼포먼스도 진행했습니다.

신신(신동혁): 그리고 두 번째 책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 책방에서 윈도우 그래픽을 작업해달라는 의뢰를 받아서 설치한 결과물을 기록한, 일종의 ‘프로세스 북’이라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원래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저희한테 장식적이고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해왔습니다만, 저희는 수동적으로 응하기보다는 그래픽 자체가 장소에 어느 정도 개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공간 자체가 인쇄물을 위한 공간이니 인쇄물이 최종 프로덕션 과정을 통해서 공간에 놓이기 전에, 있었지만 사라진 기호들을 다시 서점의 창문에 불러들였습니다. 예를 들어, 인쇄 제작 기호, 색상 마크, 교정 마크, 재단 표시 등을 다시 공간에 최적화된 포맷으로 재설정해서 설치했습니다. 인쇄의 테스트 패턴이 공간 안에 그래픽처럼 들어가면서, 실제로 이 이미지들은 사진 책과 인쇄 교정집 사이의 어떤 것을 향하고 있습니다.

『미술책방×신신×박성수 윈도우 프로젝트』(서울: 화원, 미디어버스, 2020). 제공: 신신.
『미술책방×신신×박성수 윈도우 프로젝트』(서울: 화원, 미디어버스, 2020). 제공: 신신.

아까 신해옥 씨가 디자인 전문 서적, 미학 서적과 같은 카테고리는 저희가 생각하는 것을 포함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이야기했는데요, 이런 콘텐츠 역시 화원이나 미디어버스에서 소화가 안 되면 어디에서 소화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이런 방법론에 대해 아무도 관심이 없다고 해도, 혹여 한 명이나 두 명이 저희에게 공감해 주신다면 이 플랫폼이 꽤나 유의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국립현대미술관 예산을 가지고 이런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미디어버스나 다른 출판사에서 출판되는 것이 조금 애매한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디어버스 안에 있는 디자인 방법론 관련된 임프린트인 화원에서 내는 것이 적절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신(신해옥): 그래서 두 번째 책까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희가 해야 되는 일들을 출판이라는 형태랑 연결을 해보자는 결심을 한 후, 임프린트로서, 출판사로서 화원의 모습을 확실하게 설정하고 책을 출판하기보다는, 일로 받은 프로젝트를 어떻게 많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 처음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나온 세 번째 책은 화원이라는 출판사를 이용해서 기획을 해본다면 어떤 책을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염두해두고 만든 책입니다.

신신(신동혁): 세 번째 책은 박길종 작가님의, 2012년 미디어버스 초창기 출판물 중 하나인, 단행본 『길종상가 2011』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책이 나온지 10년이 지난 시점에 박길종 씨가 10년 동안의 작업을 다시 엮고자 하는 제안을 이야기해 주셨고 첫 미팅 때 대부분의 작업에 대해서 저희에게 자율권을 주셨습니다. 저희가 생각했을 때 이 책은 단순히 ‘도록화’하면 좀 지루하고 뻔한 ‘기념비의 책’이될 것 같았습니다. 덧붙여 이 책을 보고 다음 10년을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박길종 씨께서 해주셨고요. 그래서 박길종 씨를 위한 방법이 뭘까 고민했고, 책을 통해 기념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길종 씨한테 어떤 단서를 주는 프로젝트로 진행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의 이미지 부분은 박길종 씨의 10년 동안의 작업을 갈무리하는 도큐먼트 북으로 삼고, 텍스트 북은 박길종 씨의 작업을 단서 삼아서 다른 분들이 쓴 글로 엮는 구성을 생각했습니다. 도록을 출판할 때, 어떤 이미지가 메인이 되고 텍스트가 이미지를 보완, 보충해주는 역할인 경우가 보통인데, 화원의 이 세 번째 책은 이미지와 텍스트를 완전히 분리해서 성격들을 구분했던 프로젝트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첫 번째 신해옥 씨가 기획했던 『개별꽃』에 이어서 박길종씨의 작업을 모티브로 삼은 이 텍스트 북은 『사포도』라는 제목을 따로 가지고 있으면서 『개별꽃』의 두 번째 시리즈가 됩니다. 이미지 북은 『길종상가 2021』라는 제목으로 따로 출간되었습니다. 박길종 씨가 두 책을 자매품처럼 엮어서 사람들이 세트로 구매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해주셔서 즐겁게 작업을 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하면서 ‘왜 디자이너가 책을 기획하고 출판하고 싶어할까?’라는 고민도 해보았어요. 보통 디자이너는 인쇄소 바로 전 단계인 ‘끝자락’에 있습니다. 작가나 사진을 찍는 분, 이미지를 생산한 분이 1차 창작을 하면 편집자들이 갈무리를 해서 디자이너한테 오고 디자이너가 편집자랑 주고받으면서 결과물을 만들면 인쇄소나 프로덕션으로 들어가면서 과정이 마무리가 됩니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시작점이라면 기존과 다른 편집 구조, 책을 통해서 보는 경험, 읽는 경험들을 다르게 연출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들을 떠올려볼 수 있었습니다.

박길종 씨의 책 같은 경우 기획자이자 편집자인 이미지 님과 긴밀하게 얘기를 하면서 두 가지의 성격의 책이 상호 보완될 수 있게끔 세심하게 고려하면서 진행한 점도 작업의 즐거움이었습니다. 10년 전, 박길종 씨 책을 어수룩하게 작업했지만, 『사포도』는 그동안 쌓은 경험을 통해 여러 가지 유사한 다른 프로젝트들을 고려하면서 겹치지 않는 책으로 만들어 볼 수 있었습니다.

신신(신해옥): 구정연 선생님은 『개별꽃』에 실린 글 「특별한 읽기의 조건 만들기」에서 ‘디자이너가 기획자이자 편집자로서 기존의 책을 만드는 사람들과는 또 다른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보완하고 그 안에 콘텐츠를 어떻게 담을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 주셨습니다. 그 부분이 재미있었고 저희도 여전히 잘 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개별꽃』이라는 총서를 시작하면서 임프린트 이름을 화원이라고 지은 것은 책장에 꽂았을 때 한 권씩 꽂혀 나가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저희는 임프린트의 로고를 따로 만들지 않고, 『개별꽃』의 제목에 쓰인 꽃표(*)를 책등에 넣는 방식으로 쓰고 있습니다. 다르게 생긴 꽃들을 계속 수집해서 화원의 형태를 구상해보는 것이 저희가 앞으로 해야 될 일인 것 같습니다. 둘이서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어떤 책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는데 여기 계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단서를 얻어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신(신동혁): 제가 화원 만들고 싶다고 임경용 선생님께 말씀 드렸던 당시에 임 선생님께서 바쁘셔서 제대로 설명할 기회가 없었습니다(웃음). 그래서 뒤늦게나마 설명을 해보자면 보통 저희한테 책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가 들어오면 이를 유통하거나 출판물로 등록하는 행정적인 부분이 꼭 필요합니다. 예전에 저희가 아주 잠깐 독립 출판사를 운영을 해봤는데 이 일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디자인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없는데 출판사를 운영하고 책을 유통하는 데는 또 다른 에너지가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전문가한테 맡기는 동시에 저희의 자율성은 보장을 받고 싶어서 미디어버스의 임프린트로 저희 책 시리즈를 만드는 제안을 임경용 선생님께 여쭤보았어요. 저희가 만들던 책을 미디어버스에서 ISBN 발행하는 일을 종종 부탁드렸을 때도 늘 흔쾌히 해 주셨고, 디자인 방법론과 관련된 콘텐츠는 따로 순도 높게 관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원 임프린트에 관해 말씀을 드렸고, 화원이 그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화원에서 낼 책에 관한 계획이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재미있는 번역서를 내보거나, 아니면 아무도 기록하지 않은 국내 디자인 전시 리뷰나 어떤 이의 노트 필기들을 아주 얇은 책으로 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늘 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 디자인 활동들은 제대로 아카이빙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제로원디자인센터에서 했던 전시 기록물은 지금 전혀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 것을 화원을 통해서 해볼 수 있다면, 그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구정연 외 지음, 『개별꽃(Gathering Flowers)』(서울: 화원, 미디어버스, 2020). 사진/제공: 신신.

임경용: 『개별꽃』 총서의 첫 번째 책은 절판되었어요. 박길종 씨와 만든 책 두 권의 경우에는 좀 재고가 남아 있고요. 『개별꽃』은 흥미로운 방향으로 발전될 여지가 많은 기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개별꽃』이 앤솔로지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기존의 앤솔로지는 뭐라고 할까요, 좀 일관성이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요.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 일관된 방식으로 서술하고 독자들은 그 주제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를 원하죠. 그런데 이 총서는 정말 꽃다발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우리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꽃을 모아서 다발을 만들잖아요. 그리고 균형이 중요하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종류의 꽃으로 다발을 만들죠. 첫 번째 『개별꽃』이 성공을 거둔 것은 그러한 측면이 잘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좋아하는 『F.R.David』2라는 간행물이 있는데, 이것도 좀 그렇죠.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웃음). 그래서 상대적으로 길종 씨의 작업을 『개별꽃』 안에 모았을 때 이 총서가 가진 잠재성이 완벽하게 발휘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글이 다양하긴 했지만 다 읽어보면 결국 이 책은 박길종이라는 작가에 바치는 꽃다발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굉장히 모노리스하고 읽기가 편합니다. 책을 처음 봤을 때, 이게 좀 더 불균질 했으면 어땠을까 싶었어요. 아니면 좀 다른 시각들, 크리티컬한 관점들이나 한국의 미술이나 디자인 전시에서 공간 디자이너가 가지는 역할, 한계, 관점 같은 것이 들어가서 책의 문제의식을 좀 더 확장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죠. 그래서 화원의 3, 4번째 책은 화원이 아니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그것도 화원이죠(웃음).

그리고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또 있겠지만 예산 부분인데요, 책을 제작할 때 판매부수를 예측하고 전체 예산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저희가 만드는 책 대부분이 제작비 회수가 힘들죠. 그래서 ‘한시간총서’ 같은 경우는 정말 저희가 하고 싶은, 정말 마지널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제작비를 굉장히 최소한으로 잡습니다. 200~300부만 팔려도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게요. 그러면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폭, 출판을 할 수 있는 주제의 폭이 엄청나게 넓어져요. 총서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 그것이라고 생각해요. 제작이나 디자인에 큰돈을 들이지 않더라도 총서가 안정되면 최소한의 독자층을 형성할 수 있고 그러면 그 총서는 스스로 굴러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구정연 외 지음, 『개별꽃(Gathering Flowers)』(서울: 화원, 미디어버스, 2020). 책갈피를 꽂아 둔 채로 한 손에 책을 쥐고 있다. 사진/제공: 신신.

김진주(세마 코랄 기획/편집자): 책을 만들면 본인의 아카이브에 기록이 되지 않나요? 디자이너들은 개별 아카이브가 너무 잘 구축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체계적으로 일의 프로세스가 있으니까 고스란히 아카이브에 옮겨지고요.

신신(신동혁): 피지컬한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라면 자기 포트폴리오니까 보관을 해놓지만, 그 결과물이 디자이너 혼자의 것은 아니죠. 그러니까 그 결과물이 나만의 작업이라고 하기 애매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을 관통하는 방법론이나 태도, 관점들이 텍스트화되거나 이미지로 기록이 되어 따로 보관된다고 하면, 그건 디자이너의 아카이브가 될 수 있겠죠.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기록이 거의 없다 보니까 ‘디자이너가 어디까지 한 거야?’라고 했을 때 누구도 제대로 말을 못합니다. 이런 식의 구멍이 크게 있습니다. 디자인과 관련해서 텍스트를 써주는 분들이 안 계시기 때문에 행사나 전시에 관련된 글을 부탁할 때 결국 깔때기처럼 몇몇 분들한테만 쏠리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김진주: 비평, 리뷰, 이렇게 이원화되어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구정연(더 북 소사이어티 공동 디렉터): 디자인 사업 계획도 새로 생기긴 했지만, 제가 봤을 때 디자인 비평은 없는 것 같습니다.

신신(신해옥): 그러니까 이것이 아주 밑바탕에 있어야 하는데 이런 논의들이 없으니까 큐레이터 같은 분들도 디자이너와 디자인을 장식 미술로만 소비하는 것 같아요. 전시 기획을 할 때 인터페이스 차원에서 디자이너랑 고민을 하는 게 아니라 10~20년 전과 똑같이 ‘이런 이미지 원해요’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드러나는 인터페이스가 아니라 동선을 어떻게 할지, 텍스트의 위치를 어디에 둘지, 비가시적인 인터페이스 같은 것을 고민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이 과도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구정연: 첫 번째 책처럼 전시회도 많이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김진주: 첫 번째 책들에 대한 반응을 들으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디자이너가 기획을 하느냐, 디자이너가 저자의 위치에 있느냐, 이 차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임프린트의 기획자이자 편집자, 그리고 저자로서 총체성을 가지고 있을 때 결과물이 과연 좋은 것일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신신(신해옥): 아까 임경용 대표님이 ‘시리즈 3, 4는 굳이 화원이 아니어도 된다’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맥락인 것 같습니다. 아직 네 번이지만 좀 어떤 방향성을 잘 잡고 계속 가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구정연: 신신이 워낙 형식적인 실험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니까, 이를 풀어서 텍스트화 혹은 책으로 콘텐츠화하면 좋을 것 같아요.

김진주: 디자이너들이 만든 총서라서 그런지 ‘사실상의 총서로서의 규칙성을 의도적으로 버리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리적으로도 책을 직접 보여주시면서 설명해 주셨는데 이처럼 자유롭게 던지신 걸 보고 재미있게 풀어본 총서라고 느꼈습니다.

임경용: 미디어버스는 이런 지점도 있고 또 저런 지점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편집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좀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는데, ‘의도적인 오류’ 같은 것을 책 곳곳에 배치하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있어요. 아직 실제로 해본 적은 없는데, 일종의 글리치 같은 것이죠. 보통 교정이나 교열이 완벽하게 되어 있는 책을 지향하는데, 물론 저희도 그렇습니다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실 지금 저희가 『방법으로서의 출판』이라는 책을 편집하고 있는데3, 이게 기본적으로 ‘지식의 탈식민주의’를 건드리는 지점이 있어요. 아시아 쪽 소규모 출판 실천을 다루는 책이거든요. 특히 동남아시아에 보면 출판에 대해 좀 다른 방식의 접근을 하는 작가나 출판 이니셔티브들이 있는 것 같아요. 거칠고 즉각적인 진(zine)이라는 형식을 활용하는 것이죠. 일본에도 진 문화가 있고요. 이러한 진 자체는 별 것 아니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이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들에 대해서는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저는 이들이 어떤 표준화되고 보편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어서 진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진을 선택하고 이러한 기준을 의도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자신이 소구하고자 하는 어떤 공동체(국경이나 언어를 초월한)에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제스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중국 독립출판물에서 가끔 보이는 과도한 물질성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고요. 물론 진이라고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지만요.

이게 보편성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에요. 단지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서 참고해야 할 것이 ‘서구’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는 것이죠. 이건 도서 유통도 마찬가지죠. 한국 상황에 적용시켜 보자면,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과 ‘지방’의 이분법적 사고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앙’과 ‘지방’을 나누고 이 둘이 서로 경쟁하자는 것이 아니에요. ‘중앙’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지방’이 가야하는 것은 아니죠. 『방법으로서의 출판』이라는 책을 편집하면서 든 생각은, ‘중앙’ 안에도 ‘지방’이 있다는 것인데, 당연히 지리적인 감각만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에는 제작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요. ‘아름다운 책’ 같은 경쟁이 상상하는 ‘감각의 공동체’에 자신을 내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어쨌든 이 부분은 좀 더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임경용, 구정연 편집, 『방법으로서의 출판: 아시아에서 함께하기의 방식들』(서울: 미디어버스, 2023).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네요. 제목을 “출판의 다른 장소로 임프린트”라고 좀 그럴싸하게 지었는데 그 정도의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로 다른 입장과 생각을 들었던 자리인 것 같습니다. 1인출판사라는 것이 저는 꽤 매력적인 것 같아요. 한 명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죠. 하지만 1인출판사는 아주 명백한 한계가 있습니다.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요. 저는 임프린트라는 이 느슨한 연대가, 최소한 출판에 있어서는, 꽤 유효한 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대 같지 않은 연대일 수도 있고요. 서로 다른 장소에 있지만 어느 순간에는 하나의 생각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집단지성이라는 말은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이러한 방식의 집단성은 좀 더 발전시킬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녹취록 초고 작성: 박지연


  1. [편집자 주] 1996년에 시작한 Archive.org는 생성과 사라짐을 반복하는 수많은 웹사이트, 컴퓨터 소프트웨어, 디지털 형태의 여러 문화적 자료를 저장하는 온라인 기록보관소이자 오픈소스 운동의 성격을 띤 비영리 단체이다. 설립자 브루스터 케일은 Amazon.com의 자회사가 되었던 인터넷 카탈로그(순위 제공) 웹사이트 ‘알렉사 인터넷(Alexa Internet)’의 공동 창립자로, 인터넷과 지식에 대한 모두의 접근성을 중시하는 기업가이다. 

  2. [편집자 주] 빌 홀더(Will Holder)가 편집하는 일종의 타이포그래픽 저널로 2007년에 시작했으며 네덜란드 미술 기관 de Appel에서 2016년까지 발행하다가, 2017년부터는 베를린에 있는 미술공간 KW Institute와 uh Book가 공동으로 출판한다. 비정기 간행물로 객원 편집자를 두며 매 호의 주제를 바꾸며 다양한 그래픽뿐 아니라 픽션, 논픽션 등도 함께 싣는다. https://www.kw-berlin.de/en/online-launch-f-r-david/ 참고. 

  3. [편집자 주] 임경용, 구정연 편집, 『방법으로서의 출판: 아시아에서 함께하기의 방식들』(서울: 미디어버스, 2023). 이 책은 한국어와 영어를 병기하여, 본 워크숍 이후 시점인 2023년 4월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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